2016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8월 4일(현지 시간) 바하 올림픽선수촌 한국 선수단 숙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왼쪽)이 배구선수 김연경과 함께 휴대전화 셀카 사진을 찍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최영해 국제부장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유럽계 언론은 반 총장 10년 임기 내내 ‘까는 기사’로 악명이 높았다. 취임 전인 2006년 6월 이코노미스트는 ‘반 총장은 카리스마가 없다’고 비난했고, 행정에는 능하다며 ‘주사(主事)’라는 별명도 소개했다. FT는 반 총장을 ‘미스터리 맨’이라고 비아냥댔고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2009년 6월 ‘Nowhere Man’(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뽑아 반 총장의 리더십을 공격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올 5월엔 ‘강대국에 맞서지 못한 실패한 총장’ ‘무미건조한 사상 최악의 유엔 사무총장’이라며 반 총장을 깎아내렸다. 언론의 야박한 평가엔 비(非)유럽계 사무총장에 대한 보이지 않는 편견이 담겨 있어 한국인 독자로 기사를 읽기가 적잖이 거북스러웠다.
2007년부터 10년 동안 유엔을 이끈 반기문의 자리,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촌의 복잡다단한 글로벌 이슈를 해결하려 애쓰는 국제기구의 수장(首長)이지 세계를 호령하는 ‘글로벌 프레지던트’는 아니다. 유엔을 출입하면서 반기문을 지근거리에서 취재한 미 CBS 외교 전문기자인 패멀라 포크는 관훈저널 최근호에 반 총장이 남긴 업적으로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여성인권 증진, 지속가능발전 목표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캐시 캘빈 유엔파운데이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반 총장이 파리기후변화협약 체결 과정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또 소녀와 여성들의 권리 증진에 열정을 쏟고, 성소수자(LGBT)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섰다고 강조했다. 반 총장은 연임한 뒤엔 지구촌의 빈곤 퇴치와 아랍의 봄 이후 중동 지역의 민주화 지원, 청년일자리 창출을 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해결하는 데 힘썼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9월 ‘반기문은 세계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반기문을 ‘어려운 결정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연말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세계는 그를 그리워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마도 아닐 것’이라고 자문자답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을 던졌던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성공적으로 이끈 업적은 높이 평가했다. 빈곤층과 아동사망률이 뚜렷이 감소하고 여성 교육률이 높아졌으며 세계의 전쟁을 피했다는 점도 유산으로 꼽았다. 반 총장은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나는 지구상에서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려고 했고, 보호막이 없는 사람들의 수호자가 되려 했다. 세상을 보다 좋게 하기 위해 회원국들과 함께 일하며 나의 시간과 에너지,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임기 중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역사가와 지구촌이 이를 평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반 총장 10년 평가가 과대 포장돼서도 안 되겠지만 폄훼해서도 안 될 일이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빈 반기문의 유엔 10년은 한국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밀기 위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나는 자리에서 반기문을 적임자로 소개하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대륙에까지 날아가 외국 정상들을 찾아 한 표를 부탁했다. 그의 부단한 노력 외에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이 오늘의 반기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반기문이 난파선이나 다름없는 새누리당에 승선해 정치개혁을 주도할지, 아니면 야당이나 제3지대에서 기회를 모색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유엔 안팎의 높은 관심과 주목에도 반 총장이 표류하는 한국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정치적인 비전이나 청사진을 내놨다는 얘기를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직업외교관인 그에게 과연 권력 의지가 있느냐는 뒷말도 나오고, 주변에선 출마를 말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선 실세에 휘둘린 박근혜 대통령에 분노한 민심이 지구촌 살림을 10년 동안 큰 흠 없이 꾸려나간 반기문의 글로벌 리더십에 주목할지는 그 다음 일인 것 같다.
최영해 국제부장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