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어록만 챙겼던 사람들, 처절한 반성 뒤따라야 사소한 정책도 협의가 상식… 불통 용인한 책임도 적지 않아 일상의 바른말과 소통이 민주 사회로 가는 지름길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
지금부터의 과제는 분명히 촛불 그 너머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이 새로운 헌법과 제도를 가져와 최장집 교수가 말했듯 ‘형식적 민주주의’를 도래케 했다면, 이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 방향과 내용을 가늠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반성이 깊을수록 미래로의 도약도 세고 높아질 것이다.
시민들이 응축적으로 보여준 거대한 움직임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땅의 고위 관료와 정치인, 대기업이 보여준 행위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공직을 지낸 나 자신부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이 공직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고, 비겁함의 장막 뒤로 은신하게 했을까. 대통령이 “대면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 아닌 질문을 했을 때 “그렇습니다”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아니 대면보고가 응당 필요한 절차임을 알기에 요구했으면서도 그 요구가 거대한 절벽에 부딪히는 것을 경험했을 때 왜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을까.
국정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을 잡은 사람들과 집권 여당이 이끄는 것이다. 국민 여론을 반영하여,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면서 전략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단기적인 정책을 입안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집단적인 지혜가 발동되어야 하고, 집단적인 추진력이 가해져야 한다. 이를 위한 제일의 필수요건은 소통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단어가 소통이었음은 아이러니다.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과 소통하고, 야당과 소통했어야 했다. 그것은 고사하고 정부 내에서, 당정 간에도 소통의 흔적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그 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소통의 중요성을, 대통령과 직접 대면의 필요성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정책도 협의와 조정을 통해 나와야 하는 것쯤은 상식이다.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윗분’의 불통도 큰 원인이지만, 불통을 용인한 사람들 역시 책임이 작지 않다. 일상의 비겁함이 지배했던 것이다. 자리 보전이나 출세가 됐건, ‘해 봤자’라는 체념이 됐건, 의리에 따른 것이 됐건, 바른말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추종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적으로 벌어진 악(惡)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 정부의 공직사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삼성의 갤럭시 노트7의 실패 역시 기술진의 의사가 묵살당한 데서 온, 즉 불통에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유사한 크고 작은 사례들을 중소기업이나 학교, 마을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모난 돌은 정을 맞게” 되어 있으며, 나라와 국민, 집단을 위한다는 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오너든 상사든 돈 많고, 힘센 사람이나 집단 내 이해관계의 담합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이 거스르기는 쉽지 않지만,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회피하거나 침묵하면서 순응한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 민심은 단순히 국정 유린을 자초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일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한 비상의 선이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고 나서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일상의 선이 정착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첩경이다. 일상의 선을 법이나 제도로 다 담아낼 수는 없으므로 이는 국민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 가능하다. 매주 광장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