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수덕사 초입의 수덕여관.
1937년 말, 나혜석이 수덕사를 찾았다. 4년 전 출가한 김일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일엽과 나혜석은 1896년생 동갑내기. 이들은 공통점이 많다.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뛰어난 재능과 예술적 감각을 지녔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교유했고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여성의 선두주자였다.
세상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일엽은 몇 차례의 사랑과 이별을 거듭하다 홀연 1933년 수덕사로 출가했다. 나혜석 역시 가부장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한 것이 출가였다. 일엽을 통해 수덕사의 만공 스님에게 귀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58년, 이응노는 부인 박귀희를 수덕여관에 남기고 파리로 건너갔다. 그런데 혼자 간 것이 아니었다. 연인인 대학 제자와 함께 떠났다. 파리에서 제자와 결혼했고 박귀희와 이혼했다. 1969년 3월, 동백림 사건으로 2년 반 옥고를 치른 이응노는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다. 박귀희는 10여 년 만에 찾아온 이응노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이응노는 다시 파리로 떠났다.
김일엽은 1971년 수덕사에서 입적했고,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떠나 여기저기 전전하다 1948년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첫 번째 부인 박귀희는 홀로 수덕여관을 지키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과 수덕여관을 잇는 끈은 예술이었다. 시대의 관습에 맞서며 예술에 청춘을 불살랐던 이들의 흔적과 아픔. 그건 이제 수덕여관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가 수덕여관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