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혁 경제부 기자
이번 사태에서 보듯이 ‘큰손’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는 주주총회 안건을 넘어 기업, 주식시장, 심지어 국가를 출렁이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국민의 노후 자산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국익과 투자 수익의 관점에서 독립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의사결정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은 언제든 재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거래소 산하 한국기업지배구조원(CSG)이 16일 내놓을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 초안이 주목을 받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경영 전략과 성과, 위험 관리, 지배구조 등과 관련된 사항에 의결권을 행사할 때 참고하는 자율 지침을 의미한다. 2010년 영국에서 도입됐다.
한국판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재무구조, 경영 전략 등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라”라는 지침이 있다. 하지만 5% 이상 지분 보유 상장사만 290개에 달하는 국민연금이 현재 인력으로 이를 충실히 따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관련 인력은 30여 명에 불과하고, 이들을 모두 관련 전문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내 자산운용사 관계자도 “인프라가 부족해 의결권 강화 요구를 따르기 버겁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 국내의 CSG 같은 외부 기관에 대한 의존도만 커질 것이다. 이들의 권고를 따랐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의결권 자문사들이 주주도 아니고 국익도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권고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 연기금 고위 관계자는 “한국에 사무실도 없는 ISS가 한국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권고하는 건 난센스인데도 달리 방법이 없다”라고 털어놨다.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제대로 쓰려면 이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시스템과 전문 인력부터 갖춰야 한다. 그런 준비도 없이 의결권 행사만 강요하면 의혹만 난무하고 기업 경영에 외부 세력이 개입할 빌미만 줄 뿐이다.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역풍도 커질 것이다. 어설픈 의결권 행사는 안하느니만 못하다.
이건혁 경제부 기자 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