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 도둑

입력 | 2016-12-19 03:00:00


표정훈 출판평론가

  ‘이 책을 훔치거나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는 자의 손에서 책은 뱀으로 변해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리라.’ 중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산페드로 수도원 도서관의 책에 붙어 있던 도난 방지용 글귀다. 책 절도의 동기는 다양하다. 미국의 스티븐 블룸버그는 도서관이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책들을 해방시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1960년대 말부터 20여 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268개 도서관에서 2만3600여 권을 훔쳐냈다.

 우리 돈 약 55억 원 가치에 달하는 이 특별한 장물을 그는 팔지 않고 보관했다. 1990년 체포되어 5년 11개월 징역형과 20만 달러 벌금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지만, 출소 후 여러 번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변호인은 블룸버그의 정신 이상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 때부터 30년간 유럽 각지 서점, 도서관, 박물관, 교회 등에서 5만2000권을 훔친 영국의 덩컨 제번스도 전설적인 책 도둑이다. 1993년 그가 체포된 뒤 4만여 권을 본래 소장처에 되돌려주는 데 2년이 걸렸고 1만2000여 권은 경매 처분되었다. 제번스는 학문에 대한 선망과 지식욕을 채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1996년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에서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초판 인쇄본 두 권과 갈릴레이의 저작 유일본이 사라졌다. 2006년에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대 도서관에서 고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 15세기 인쇄본과 코페르니쿠스, 케플러의 초판본이 도난당했다. 문화재급 책 밀거래로 큰돈을 챙기려는 이러한 절도에는 서지학자까지 가담하여 장물을 감정해 주기도 한다.

  ‘한량들이 종이 신발 신는 것을 멋으로 알고 또 이를 만들어 파는 자가 많은데, 신발 만들 종이를 구하고자 사대부 집과 관가에 책 도둑이 성행하니 단속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숙종 9년(1683년) 한성판윤이 올린 상소 내용이다. 책 절도의 이유치고는 역사상 참 드문 경우다. 조선 종이의 빼어난 내구성을 증언한다 할까.

 도서관 대출 자료 미반납도 심하면 절도가 될 수 있다. 2015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채핀 메모리얼 도서관 측은, 1996년 이후 책을 반납하지 않은 900여 명을 고발했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들도 이 문제로 골치를 앓는다. 반납이 늦어져도 일정 기간 대출해주지 않는 것 외에 별다른 제재 방법이 없다. 잊는 것이 빌린 책인지 양심인지 모호해지기도 쉬운 책 미반납을 근절할 묘안은 없을까.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