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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미음과 죽

입력 | 2016-12-21 03:00:00


황광해 음식평론가

 정국이 복잡하게 얽혔다. 정조 10년(1786년) 12월 1일, 왕대비 혜경궁 홍씨가 한글 하교문을 승정원 등에 내린다. “5월에 원자(元子)가 죽고 9월에 또 변고가 있었다.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 그간 목숨을 연명,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속미음(粟米飮)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제는 이것도 들지 않고 죄다 봉해서 날짜를 표시해 두었다. 그간 미음을 든다고 대전(大殿·임금)에 말했으나 지금 병세는 실로 부지하기 힘들다.”

 미음은 몸이 아플 때 먹는 것이다. 미음이나 물도 마시지 않는 것은 죽겠다는 시위다. 단식 투쟁이다. 속미음은 좁쌀로 끓인 미음 혹은 죽(粥)이다. 혜경궁 홍씨가 미음도 끊고 시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 5월에 홍역으로 문효세자가 죽었다(5세). ‘9월의 변고’는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죽음이다. 의빈 성씨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제 정조의 아들은 없다. 차기 대권 향방이 오리무중이다. 혜경궁으로서는 절박했을 것이다.

 혜경궁이 문제 삼은 대상은 죽은 전임 도승지 홍국영(1748∼1781) 일파의 ‘그림자’다. 홍국영은 정조의 ‘문고리 권력’이었다. 비선이자 실선의 실세였다. 젊은 나이(29세)에 도승지가 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원빈)으로 밀어 넣어 외척이 되려 했으나 원빈의 죽음으로 실패했다. 정조의 이복 조카였던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받아들여 ‘정조 다음’을 꿈꾸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홍국영이 죽은 후 5년이 지났다. 혜경궁은 여전히 궁궐에 홍국영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홍국영은 정조 반대파인 노론 벽파와 손잡았고 그들이 궁궐에 남아 있었다. 혜경궁은 속미음도 거부하고 ‘홍국영의 그림자’를 걷어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영조도 속미음을 이용하여 한바탕 시위를 벌였다. 영조 32년(1756년) 2월 18일 한밤중, 영조가 느닷없이 진전(眞殿) 동쪽 뜰에 돗자리를 깔고 북향하여 엎드린다. 붕당, 당파 간의 심한 싸움에 대한 국왕의 항의다. 진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내가 신하들의 붕당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고 선왕들에게 고했다. 이제 또다시 붕당과 싸움이 일어나니 내말이 거짓이 되었다. 선조들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예순 살을 넘긴 국왕이 홑겹 돗자리를 깔고 한밤중 찬 바닥에 엎드렸다. 신하들로서는 큰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신하들이 속미음을 올렸으나 임금이 끝내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미음도 먹지 않겠다’는 걸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진솔한 ‘미음 단식’도 있다. 영조 24년(1748년) 7월, 영조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딸’이라고 불렀던 화평옹주가 죽었다. 22세. 영조는 “미음 같은 음식도 잘 넘기지 못하여 매양 답답한 때가 많다”고 한탄한다.

 몸이 허약한 경우는 함부로 “미음도 먹지 않는다”고 단식을 내세울 일은 아니다. 미음은 환자식이다. 경종은 원래 몸이 약했다. 세상 떠나기 하루 전인 경종 4년(1724년) 8월 23일, ‘설사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약방에서 입진, 탕약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을 올렸다’고 했다. 인삼속미음은 인삼과 좁쌀로 끓인 죽이다. 다음 날인 8월 24일의 기록. ‘도제조와 제조가 미음(粥飮·죽음) 드시기를 권하였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세제(世弟·영조)가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고, 미음을 올렸다’고 했다.

 정조도 마찬가지. 조선왕조실록 정조 24년(1800년) 6월 22일의 기사. 정조가 위독하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6일 전.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는 드셨느냐?”고 여쭙는다. 정조는 “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라고 답한다. 6월 26일에는 좌의정 심환지가 “음식은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조금 전, 흰 도라지 미음을 조금 마셨다”고 답한다.

 죽은 되다. 미음은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가르기는 힘들다. 죽과 미음은 혼용했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신하들이 세손 정조에게 ‘죽음(粥飮)을 바쳤다’는 내용도 있다. 죽과 미음을 혼용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중국 사신은 미음을 즐겨 찾으니 큰 쟁반에 사발을 두고 미음을 담는데 잣죽(果松粥·과송죽)이든 깨죽(胡麻粥·호마죽)이든 모두 좋다’고 했다(목민심서 예전). 미음과 죽을 혼용한 것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