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과연 ‘개혁군주’였나 북학 받아들여 부국강병커녕 아버지에 매달린 수구반동인가 만기친람에 비선과 비밀어찰… 공적 시스템 무력화까지 전제군주와 비슷한 대통령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했던 박정희가 지하에서 통곡할 판
김순덕 논설실장
첫째 만기친람(萬機親覽)이다.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보살핀다는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조선 국왕이 정조였다. 보고서 읽기를 좋아했고,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면 큰일에 소홀해지기 쉽다”는 상소문까지 받았다. 지금이야 박 대통령이 서면보고만 받은 이유가 비선 실세 최순실한테 보내기 위해서였나 싶지만 국장급 인사까지 챙기는 대통령의 업무 행태도 만기친람으로 표현됐다.
‘의리’를 강조한 것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은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라며 배신의 정치를 증오했다. “의리 지키니까 이렇게 대접받잖아”라고 확인한 이가 최순실이다. 정조는 의리를 국정철학으로 놓고 시의(時議·특정 시기의 공의)에 따라 자신이 판단했다. 인재 등용의 탕평책도 영조가 무당파적 탕평책을 쓴 데 비해 정조는 옳고 그름을 가려 쓰는 준론탕평(峻論蕩平)으로 달랐다.
정조는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도통해 모든 개천을 비추는 달빛 같은 군주(萬川明月主人翁)가 됐다고 자부했기에 이 모든 것을 해냈을 것이다.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 또는 온 우주의 기운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박 대통령도 대통령제 개헌론까지 불러온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2013년 청와대 첫 송년만찬에서 “오로지 국민이 북극성”이라고 했다지만 혹시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 중심의 정치판을 짜려고 했던 정조실록을 거꾸로 인용한 건 아닌지 의심증이 생긴다.
발음하기도 민망한 병신년을 보내며 정조를 떠올리는 건 일종의 속죄의식 때문이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미국이 건국하고 영국에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온 그해 우리도 ‘개혁군주’를 맞았다고 올 초 나는 글을 썼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1800년 정조 서거 뒤 망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진보좌파 주장대로 북학파 같은 개혁세력이 보수반동세력에 밀려나서가 아니라, 정조가 기른 그 개혁파가 기득권 세력이 되면서 관념과 특권, 향락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운동권 ‘86그룹’의 타락을 지적했다.
올해가 가기 전 정조를 들여다보다 새롭게 발견한 역사가 있다. 드라마에선 백성과 절절히 교감하는 듯했던 정조가 결코 개혁군주라고 하긴 어렵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유럽의 격차가 확실해지면서 유럽 중심의 시스템이 뿌리를 내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의 대분기(Great Divergence), 일본도 중국과 통상하며 부국강병을 달성한 이 중요한 시기에 정조는 이미 망한 명나라와 성리학에 매달려 왕권을 강화하는 거꾸로 개혁을 한 것이다.
문체반정이 단적인 예다. 이덕일 같은 역사학자는 노론의 천주교 탄압 요구를 물리치기 위한 작은 사건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 이상의 수구반동은 없다.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화성에 북학을 활용한 성곽을 쌓고 제도 개혁의 신도시를 만들려 했다지만 신해통공처럼 도루묵된 개혁을 보면 믿기 어렵다. 정조 서거 뒤 터진 삼정문란이나 민란은 민생을 외면한 채 화성 축성에 매달렸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1979년 10월 27일 화성복원기념식에 참석 예정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전날 서거한 것은 역사의 묘한 우연이라 치자. 그래도 박정희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제시했던 대통령이었다.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을 처참하게 주저앉힌 박 대통령은 그 죄를 어떻게 씻을 참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