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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우롱, 농락, 농단의 한 해

입력 | 2016-12-26 03:00:00


 한 해를 닫는 주간이니 이 해를 돌아보는 가까운 시간여행으로 이번 회를 대신할까 합니다. 올해의 상징어로 일본에서는 ‘金(금)’, 중국은 ‘規(규)’ 같은 글자들이 뽑혔다지요. 한국은 ‘君舟民水(군주민수)’가 선정되었답니다. ‘군주는 배, 백성은 물.’

 만약 시간여행 코너에서 올 한 해를 관통하는 글자 하나를 뽑으라면 ‘弄(롱)’이 어떨까 합니다. 희롱(희弄) 우롱(愚弄) 농간(弄奸) 할 때의 ‘롱’입니다. 농단 할 때의 그 농이나 농락의 농과는 다른 한자이긴 하지만, 가지고 논다는 어감과 그 불쾌지수에 있어서는 엇비슷합니다.

 국정 농단의 사례가 올가을에 폭로되기 전에, 나라의 새싹들을 집이나 보육원에서 일상적으로 농락하는 아동학대 사례가 속속 드러나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아동인권 유린은 우리의 전통 속에 오랜 뿌리를 갖는 것이었습니다(2월 11일자 ‘박윤석의 시간여행’). 서해바다를 농락하고 한국의 공권력을 우롱하는 중국 어선의 행패 역시 100년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6월 20일자). 

 브렉시트라는 이름의 유럽 균열은 영국인과 세계인 다수가 우롱당했다는 불쾌감과 더불어 어떤 농간마저 의심하게 만든 사태였지요. 유럽의 주기적 파열음은 그 역사가 오랜 것이지만 전쟁이 아닌 형태로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드문 일이었습니다(7월 4일자). 이어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미국인과 세계인 다수를 농락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경제 문제 때문에 죽었다는 지적과, 공화 민주 양당의 정책 차이는 겉보기와 달리 크지 않다는 지적은 일찌감치 80년 전의 선거 때에도 제기된 것이었지만 이번의 충격은 컸습니다(7월 25일자).

 한국에서는 국가 방어를 위한 고심의 전략이 전자파 운운하는 괴담에 우롱당하기도 했지요. 괴담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사에 유구합니다(7월 18일자). 그 지독했던 폭염도 과거로 돌아가면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고(8월 1일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지진도 오래전부터 경고되어온 일이었습니다(9월 19일자). 자연이 인간을 희롱하는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이 교만과 무지로 스스로를 우롱해온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올해 러시를 이룬 탈북 행렬 역시 조선 후기에서부터 그 뿌리가 이어져 있으며(9월 5일자), 인권의 유린이라는 국가적 농락과 조직적 농간 앞에서 무력한 개인이 결단하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동일합니다. 여담이지만 올해 노벨상위원회도 문학상 부문에서 상을 주고 우롱당하는 느낌을 어쩌면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12월 12일자)

 11월 들면서부터 5주 연속 국정 농단과 관련된 주제로 시간여행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법을 희롱하려 드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없었으면 합니다. 국법을 우롱한 처사에 대해, 법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속히 처리하자고만 하면, 헌법 농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민주주의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이 남의 말이 아니라는 것.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왜 현행법을 거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기에도 적당한 시즌 같습니다. 세상이 나를 우롱한다고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뉴이어 사이를 애써 걸어가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법을 농락하거나 세상을 우롱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