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문화부 차장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월나라와 오나라의 치열한 싸움이 나온다. 오나라에 패했던 월나라의 왕 구천이 3년간의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드디어 복수에 성공했다. 이때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던 월나라의 재상 범려는 자신이 모시던 왕 구천을 떠나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회사에서나 가정생활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어려울 땐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었는데, 함께 즐기기엔 힘든 사람이다. 회식 자리에서 혼자만 술을 너무 마셔 분위기를 망치는 직장 상사, 모처럼 가족 나들이에 돈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싸우다가 ‘다시는 함께 놀러오나 봐라’고 씩씩대는 부부들….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권력자나 졸부들에게 갑자기 닥친 즐거움은 무절제한 부패 스캔들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가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내세웠지만, 바로 문화 분야에서 발생한 스캔들로 몰락하게 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문화융성에 대한 깊은 철학이 없이 그저 ‘문화로 돈을 버는 것’으로 치부한 천박함이 최순실 게이트를 불러왔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지시한 업무지침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라니….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을 방불케 하는 시대착오적 지침으로 어떻게 ‘국민행복’과 ‘저녁(문화)이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문화의 산업화’가 아니라 ‘산업의 문화화’다. 문화로 돈을 벌려 하기보다는, 일과 산업이 즐거움 그 자체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있는 것은 개발시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요즘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중 하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의 노래’다. 이 노래의 배경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끝난 후 41년이 지난 1830년이다. 대혁명이 일어났지만 민중의 삶에 당장 큰 변화는 오지 않았고, 장발장은 먹을 것이 없어서 빵을 훔쳐야 했다. 우리 사회도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탄핵된다고 해서 당장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였지만 여전히 천민자본주의, 정경유착의 고리는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촛불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도덕성, 정신문화 성숙을 향한 ‘일상 속 명예혁명’으로 끊임없이 타올라야 할 것이다.
최근 한 대학가에는 ‘박정희의 최대 실패는 자식교육’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고 한다. 우리도 제2의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를 만드는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다. 엄마가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학급 회장 출마 연설문도 써주고, 대학이나 직장 갈 때 자기소개서까지 채워 주고 있지 않은지. 최순실이 없으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박 대통령처럼, 우리 아이들도 부모가 조종하는 자동인형으로 키우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최순실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새뮤얼 헌팅턴의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은 차기 정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