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산업혁명’ 주역들의 열망
식민지 조국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산업화의 아버지들’은 평생 일본이라는 존재를 강하게 의식했다. 경제 극일(克日)은 그들의 삶에서 핵심 화두였다.
국산 라디오를 만들어 외국 제품과 경쟁이 되겠느냐며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구인회가 남긴 말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PX에서 나오는 외국 물건만 사 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해야 하고 먼저 하는 사람이 고생도 하겠지만 고생하다 보면 일본의 내셔널이나 도시바처럼 될 수도 있다. 무서워 앞장서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어서지 못한다.”
한국은 1960년대 ‘경제혁명’을 시작한 뒤 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일본 따라잡기에 성과를 올렸다. 비교도 안 됐던 한일 경제력 격차는 약 1 대 3으로 좁혀졌다. 1인당 국민소득도 한국 2만7000달러대, 일본 3만2000달러대로 추격의 가시권에 들어왔다. 삼성전자는 소니를 앞질렀고 포스코는 신일본제철, 현대자동차는 도요타차의 경쟁상대로 떠올랐다.
모건스탠리의 루치르 샤르마 사장은 2012년 저서 ‘브레이크아웃 네이션스(돌파 국가들)’에서 한국이 극일을 목표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글로벌 기업들을 성장시킨 점을 평가하면서 조만간 한국이 일본을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뉴욕주립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2010년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 한국을 추가해 BRICKs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요즘 두 나라의 대조적 현실을 보면 경제 극일의 꿈은 당분간 접어야 할 것 같다. 일본은 오랫동안 금기시한 카지노 허용 법안까지 통과시킬 만큼 정부, 정치권, 재계가 협력해 경제 회생에 총력을 기울인다. 반면 한국은 성장의 필수조건인 경제적 자유와 기업 활동을 억압하는 것을 개혁이나 시대정신으로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뚝뚝 떨어지는 한국과 달리 일본이 최근 경기전망을 상향조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성장엔진이 멈춘 뒤 다가올 미래는 더 잘살면서 격차가 줄어드는 나라이기보다는 하향평준화와 빈곤화로 이어질 위험성이 농후하다. 노무현 정권 시절 한 젊은 실세가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면 어떤가. 모두 평등한 세상이 더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기억도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시행착오와 혼란을 얼마나 더 겪은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경제 극일로 가는 불을 다시 붙일 수 있을까.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