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논설위원
그러나 종전과 함께 지배층은 변심했다. 전시의 개혁입법은 유야무야됐고 사대부는 다시 당파싸움에 골몰했으며 전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선조는 죽을 때까지 경운궁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의 몰락은 이때 이미 예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유년의 기억, 지배층의 배신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결여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설파했는데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국민에 대한 예의나 최소한의 양식도 찾을 수 없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청문회에서 최순실을 “진짜 모른다”며 부인하다가 막판에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고 했고, 우 전 민정수석은 “박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해 최강의 멘털을 보여줬다. 안봉근 전 비서관은 “자녀가 신경 쓰이고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청문회에 나오지 않았고 안종범 전 수석은 “모든 걸 대통령이 시켜서 했다”고 말했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길거리나 한강 둔치 등 최순실이 기다리라던 곳에서 대기하다 최 씨의 차에 타서 지시를 받았다. 이화여대는 정유라에 대한 입학을 취소했으면서도 교수들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강변한다. 이런 게 나라를 이끌던 권력자와 지식엘리트의 민낯이다.
가진 자 기득권 버려야 역사 발전
대런 애스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국가가 실패하는 건 지도자의 무지 탓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가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엘리트가 바른 윤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기득권을 포기할 때 나라는 융성하지만 비겁하게 행동할 때 망국의 지옥문이 열린다. 이건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 만고의 진리다. 2016년 최대의 실패자는 엘리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