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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의 사회탐구]2016년, 엘리트 치욕의 해

입력 | 2016-12-31 03:00:00


정성희 논설위원

 새해는 420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보내 조선을 재침략한 정유재란(1597년)이 있었던 정유년이다. 당시 조선이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장군의 존재, 명군의 개입 외에도 유성룡이 제안한 면천법과 같은 개혁입법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의병에 가담하면 천민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해 준 면천법과 각종 공납을 쌀로 대신해 훗날 대동법의 모태가 된 작미법, 양반도 노비와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법으로 민심을 되돌려 승전의 계기를 삼을 수 있었다. 벼슬아치들은 개혁에 저항했지만 왜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대의 앞에 양반도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지배층은 변심했다. 전시의 개혁입법은 유야무야됐고 사대부는 다시 당파싸움에 골몰했으며 전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선조는 죽을 때까지 경운궁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의 몰락은 이때 이미 예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유년의 기억, 지배층의 배신

 2016년 우리가 살아온 나라는 어떤 나라였나.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지식’ 등 간디가 주창한 7대 사회악의 정수를 우리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목격했다. 국민이 분노한 것은 단순히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아니라 개돼지인 민중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지식엘리트 경제엘리트 법률엘리트의 공고한 카르텔이었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혼자 가능했을까. 뛰어난 법률 지식과 실행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조력 덕분이었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자신에게 제기되는 여러 의혹에 대한 감찰에 착수한 이석수 특감에게 “형 어디 아파?”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그들만의 리그에 익숙한 엘리트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특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결여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설파했는데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인사들에게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국민에 대한 예의나 최소한의 양식도 찾을 수 없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청문회에서 최순실을 “진짜 모른다”며 부인하다가 막판에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고 했고, 우 전 민정수석은 “박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해 최강의 멘털을 보여줬다. 안봉근 전 비서관은 “자녀가 신경 쓰이고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청문회에 나오지 않았고 안종범 전 수석은 “모든 걸 대통령이 시켜서 했다”고 말했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길거리나 한강 둔치 등 최순실이 기다리라던 곳에서 대기하다 최 씨의 차에 타서 지시를 받았다. 이화여대는 정유라에 대한 입학을 취소했으면서도 교수들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강변한다. 이런 게 나라를 이끌던 권력자와 지식엘리트의 민낯이다.

가진 자 기득권 버려야 역사 발전

 대런 애스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국가가 실패하는 건 지도자의 무지 탓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가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엘리트가 바른 윤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기득권을 포기할 때 나라는 융성하지만 비겁하게 행동할 때 망국의 지옥문이 열린다. 이건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 만고의 진리다. 2016년 최대의 실패자는 엘리트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