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주의 기운이 도왔다고 할 만한 행운도 있었다. 우선 2015년 우리 사회를 공포로 몰았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작년엔 한국을 피해 갔다. 지카 바이러스 감염자 16명 중에 임신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치사율 50%인 황열을 옮기는 모기가 한반도에 정착하지 않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작년에 발생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을 뿐, 당장 올해 현실이 돼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정부의 감염병 대응 시나리오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예컨대 ‘메르스 대응 지침’엔 의심환자 발생 시 지방자치단체와 병·의원이 취해야 할 조치가 28쪽에 걸쳐 상세히 적혀 있지만 초중고교나 회사에서 환자가 나왔을 때 등교 중지나 휴업을 결정할 법적 근거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다. 2015년 ‘35번 환자’처럼 1000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에 다녀간 환자가 나타나면 어느 범위까지 자가 격리 시킬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질병관리본부가 최근 ‘모기 매개 감염병 토착화 대응 시나리오’ 개발에 착수한 것은 반길 일이다. 동남아에서 뎅기열에 걸린 채 귀국한 환자가 모기에 물리면 그 모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기 때문에 토착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2014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뎅기열이 확산된 전례를 감안하면 한국에서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병관리본부는 다양한 돌발 상황을 상정해 우리의 방역 체계가 과연 그에 견딜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해 주길 바란다.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병은 사라진 게 아니고 책갈피와 방구석에 숨어서 우리가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공무원의 상상력이 빈곤하면 혼란은 고스란히 위기로 이어진다.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