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특명, AI서 토종닭 3800마리 지켜라”

입력 | 2017-01-05 03:00:00

평창 축산과학원 축사 비상근무



강원 평창군 국립축산과학원 가금연구소에서 키워낸 토종닭들. 조류인플루엔자(AI)가 창궐한 이후 연구소는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고 ‘토종닭 지키기’ 전쟁을 펼치고 있다. 국립축산과학원 제공


 국립축산과학원 가금연구소 신용훈 실무관(40)은 강원 평창군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토종닭 3800마리를 ‘모시고’ 산다. 지난해 11월 전남 해남 농가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병한 뒤부터 시작된 일이다. 

 그가 머무는 축사는 ‘토종닭의 방주(方舟)’나 마찬가지다. 이곳은 인간으로는 그와 동료 1명만이 출입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맞교대로 닭들을 섬긴다. 둘은 서로 오염물질을 옮길까 봐 숙소도 따로 쓴다.

 축사 출입도 쉽지 않다. 이틀 전까지는 정해진 숙소에 들어가 몸을 깨끗이 정화해야 한다. 축사에 들어갈 때엔 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는 반도체 공장에서처럼 소독 절차를 거친다. 한번 축사 출입을 시작하면 별도 숙소에서 9일간 머물며 닭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9일 치 식량과 생필품도 챙긴다.

 축사에서 나와서도 조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옆 건물 축사를 이용하는 서울대 평창캠퍼스 실험목장 직원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새벽에만 움직인다. 가금연구소 김상호 연구관(50)은 “한번 축사 출입을 시작한 사람에게 축사 외부 지역은 모두 오염됐다고 전제하고 행동하도록 돼 있어 외부 접촉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고 소개했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쉴 때도 외부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 행동반경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토종닭에 AI 감염 물질을 옮길까 조심할 수밖에 없어서다.

 사상 최악의 AI가 전국을 덮치면서 가금연구소는 말 그대로 AI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연구소 축사에서 살고 있는 토종닭들이 엄청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국의 산간오지를 샅샅이 뒤져 모셔온 재래닭의 후손들이다. 토종닭은 육질이 쫄깃하고 식감이 좋지만 크기가 작아 경제성이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외국산 수입종에 밀리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가금연구소는 1992년부터 복원 및 개량작업에 착수했고, 2007년 마침내 기존 토종닭보다는 빨리 크고 맛도 좋으며 알을 잘 낳는 닭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2014년 가금연구소에 큰 시련이 닥쳤다. 토종닭들이 머물던 농장(충남 천안시 성환읍) 주변에서 AI가 집중 발생한 것이다. 방역에 총력전을 펼쳤지만 헛수고였다. 토종오리가 감염됐고, 15년에 걸쳐 복원한 귀하디귀한 토종닭 5000마리는 모두 도살처분해야만 했다.

 가금연구소는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고, 최종적으로 축사를 옮기기로 했다. 새 농장의 입지는 철새 접촉이 덜해 AI 청정지로 꼽히는 강원 평창군을 낙점했다. 축사를 짓는 도중엔 서울대 평창캠퍼스의 실험목장에 간이 축사를 마련했다. 또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유전자원센터에서 키우던 토종닭을 경북과 경남, 강원 지역에 고루 나눠 배치했다. AI 감염에 따른 피해를 분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2017년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을 맞아 토종닭 종자를 지키는 가금연구소 직원들의 어깨는 무척 무겁다. 강보석 연구관(54)은 “고유 종자를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방역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면서 “AI가 하루빨리 종식돼 간이축사에 머물고 있는 토종닭을 새 축사로 모시는 게 새해 소망”이라고 말했다.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