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고급 한정식집에서 선보인 ‘김영란 메뉴’는 저녁에 2만9500원을 받는다. 가격을 맞추려고 음식 질을 낮추고 가짓수도 줄였다. 술은 소주 1만 원, 맥주는 8000원을 따로 받는다. 세트메뉴가 3만 원 미만일 것으로 알고 온 손님들은 낭패를 봤다. 손님은 끌어야겠고 어떻게든 이문도 맞춰야 하니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대학에서 교수에게 학점을 올려 달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내려 달라고 하는 것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속칭 김영란법) 위반이다. B학점을 받은 학생이 다음 학기에 A를 받기 위해 재수강하려면 C 이하로 낮춰 줘야 하는데 교수가 이것도 맘대로 할 수 없다. 학생들은 “부패사회를 맑게 하자는 것과 학점 내려 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연말연시 승진 전보인사가 잇따랐지만 축하 난도 사라졌다. 5만 원 이하짜리를 보냈다 해도 찜찜해 돌려보내는 일이 적잖다. 매출이 급락한 화훼 농가에선 장사가 안 된다며 아우성이다. 문 닫는 음식점이 속출하고 대리운전 기사는 손님이 없다고 울상이다. 청렴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통이다. 하지만 당장 소비 위축은 발등의 불이다. ‘3(음식)-5(선물)-10(경조사비)’을 ‘10-5-3’으로 바꾸자는 얘기도 나온다. 먹는 것은 풀어줘야 꽉 막힌 경제에 숨통을 틔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공립학교에선 스승의 날을 즈음해 가정에 통신문을 보낸다. 카네이션 5달러, 식사 쿠폰은 20달러에 원하는 만큼 학교에서 살 수 있다. 캔 커피도 못 주는 경직된 김영란법과 대비된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100일이다. 김영란법을 밀어붙인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청렴사회 구호가 한순간에 빛바래졌다. 대통령이 대기업 팔을 비트는 마당에 김영란법이 무슨 소용이냐는 얘기가 나올까 걱정이다. 대통령 눈치 보느라 입법 과정에서 한마디도 못한 관계 부처 장차관들이 현실에 맞도록 법을 손볼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상식과 지나치게 동떨어지면 성공하기 어렵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