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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동영]해방구 광화문광장

입력 | 2017-01-05 03:00:00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2009년 8월 서울 한복판에 광화문광장이 생길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걱정이 많았다. ‘소통의 장’을 만든다는 좋은 명분이 있었고 스케이트장이나 스키점프대 같은 이색 볼거리 즐길거리가 준비돼 있었는데도 말이다. 청와대와 정부청사, 미국대사관이 코앞이니 온갖 집회 장소로 변질되지 않겠냐는 안팎의 우려가 잇따랐던 탓이다. 청와대에선 경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광장 건설을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16차로인 도로 전체를 광장으로 만드는 계획이나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붙여 만드는 방안 대신 섬처럼 지금의 모양으로 가장 작은 규모로 결정된 데에는 이런 걱정들이 영향을 미쳤다.

 세상이 주목하는 공간이니 집회나 특정 단체의 기자회견이 자주 열렸지만 광화문광장은 언제나 시민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다. 입장료도 없어 지하철로 연결된 광장에 나와 탁 트인 도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름에는 바닥분수가 가동돼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돼 주었고 외국인 관광객은 세종대왕 이순신 동상, 해시계를 보며 한국을 배웠다.

 2016년에는 국민을 우롱하고 국정을 농단한 청와대를 향한 촛불민심이 광화문광장으로 모였다. 춥거나 비가 와도 토요일마다 광장은 함성으로 가득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불과 몇 시간 전 수십만 인파가 광장을 메웠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평상시로 돌아가 있었다.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말 그대로 광장임을 보여줬다.

 그랬던 광장이 점점 해방구로 변해 가고 있다.


 2017년 1월 광화문광장에는 수십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50개에 달하는 텐트는 물론이고 대형 천막과 조형물, 그리고 가설무대까지 터를 잡고 있다. 감옥도 있고 전시회도 열리는 중이다. 폭력시위로 실형을 선고받은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간 이석기 전 국회의원을 석방하라는 구호부터 ‘김재규 부활, 방아쇠를 당겨라’ ‘전시작전권 환수’ ‘대리점 피 빨아먹은 KT’까지 내걸렸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바로 앞은 높이 3m 정도의 인물 조형물이 가로막고 있다. 좌우로는 이재용 정몽구 회장이 회사 로고와 함께 서 있고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목에 대형 주삿바늘을 꽂은 모습이다. 예전에는 이순신 동상을 사진 찍었을 외국인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주사기를 꽂고 있는 한국 대통령 조형물을 사진 찍어대고 있다. 관광 가이드가 조형물 앞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설명해 주자마자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은 놀라며 연신 사진을 찍는다.

 박 대통령 탄핵 절차는 헌법재판소에서 착착 진행 중이고 그와 주변 인물의 갖가지 범죄 혐의는 특별검사가 밤을 새워가며 수사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모여 민의를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올 수많은 사람을 위해 내일은 촛불을 들지 않고 양보하는 게 광장의 정신이다. 하지만 지금은 광장의 정신을 짓밟고 촛불민심을 가장해 광장을 차지하려는 일부 단체의 극성스러움이 가득하다. ‘박근혜 구속하라’는 구호만 앞세우면 광화문광장을 차지해도 괜찮은가.

 열린 광장을 만들어야 할 서울시는 오히려 이런 해방구 조성에 힘을 실어주는 중이다. 불법으로 광장을 채운 시설물을 걷어내지는 못할망정 “합법화시켜 주기 위해 해당 단체들과 협의 중”이라는 답변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변상금을 물릴지 검토 중이라고 하면서도 변상금 산정의 기초인 점유 면적을 묻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서울시다.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는 단체가 박 시장 인형을 크게 만들어 광화문광장에 세워도 합법화시켜 줄 텐가.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