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20년, 기회의 문 넓히자/연중기획]<5> 추락한 공정 리더십
직장인 김모 씨(46)의 첫딸은 돌 반지가 남아 있지 않다. 1997년 12월 ‘나라 곳간’의 달러가 바닥을 드러냈고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듬해 1월 5일 장롱 속 금붙이를 내다 팔아 외화 한 푼이라도 더 모으자는 전 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됐다.
김 씨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창구엔 군부대 헌혈 행사처럼 금붙이를 들고 온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섰다. 연애하며 아내와 주고받았던 부부의 금반지도 그때 사라졌다.
하지만 김 씨는 20년 전과 같은 위기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금 모으기와 같은 운동에 다시 참여할 생각이 없다. 김 씨는 “그때는 순진했다. 정치 상황을 보니 결국 부패한 집단에 갖다 바치는 꼴이 될 텐데 누가 내려고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게 나라냐.”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민심도 김 씨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국민은 기득권을 가진, 부패한 사회 지도층이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할 기회를 가로챘다는 점에서 분노했다. 불공정한 리더십에 대한 불신과 실망은 동아일보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12월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됐다.
○ 국민 절반, “금 모으기 운동 다신 않겠다”
세대 간, 계층 간 간극도 나타났다. 참여 의향은 60대 이상이 53.5%로 가장 높았고, 30대가 40.9%로 가장 낮았다. 월평균 가구 소득 100만 원 미만(54.8%), 농림·축산·수산업 등 1차 산업 종사자(70.6%), 무직자(63.9%) 등 경제적 약자들의 참여 의향이 높은 것도 눈길을 끌었다.
외환위기 이후 기득권층과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징후도 나타났다.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부자들은 참여하지 않고 서민들만 참여할 것 같아서’(42.4%),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28.7%),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없어서’(19.3%) 등을 꼽았다.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직장인 최모 씨(29)는 “부모님이 장롱 속 깊은 곳의 금, 행운의 열쇠 등을 죄 꺼내 놓기에 이사를 가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최 씨는 “힘 있는 사람들이 깨끗해지면 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우리 사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국민 87.9% “신뢰하는 정부 기관 없어”
법원 검찰 등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꼽은 응답도 6.1%에 불과했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민심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울 책임이 있는 사법 시스템조차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국회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 꼽은 응답도 3.3%에 불과했다. 당장은 촛불의 화살이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하고 있지만, 정치권과 국회에 대한 불신도 이에 못지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국민의 촛불이 광화문광장을 뒤덮었던 지난해 말 영국 공영방송 BBC는 부패한 상류층과 정직한 국민이 공존하는 한국의 기이한 현실을 꼬집었다. BBC는 “한국에서는 술집에서 자리를 맡기 위해 테이블 위에 지갑을 두고 가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을 정도로 시민들이 정직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부정부패로 망가졌다”라고 비판했다.
국가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사회적 신뢰를 재건하려면 누구에게나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 줄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번 조사에서도 ‘대선 이후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4.0%가 ‘그렇다’고 답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권력자의 의사결정이 공적 시스템을 통해 투명하게 이뤄지도록 대수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성모 mo@donga.com·손영일 기자
동아일보-KDI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