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레이코프-M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
언제쯤이었을까? 어느 때, 어느 곳의 기억이 호출된 걸까? 시인에게 과거나 현재는 의미가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낭송이 시작됐을 때 달은 조금 더 높이 떴다. 제목을 읽고 본문을 읽기 시작하기까지는 조금 간격이 있었다. ‘직유에 대하여’라는 시 제목을 말하는 소리는 그저 일상적인 목소리였지만 시가 시작되면서는 약간 격앙되는 것 같았다.
‘똥이다 할 때/똥에게 죄송하다/여우같은 할 때/여우에게 죄송하다/독사의 자식 할 때/독사와/독사 조상에게 죄송하다/개 같은 할 때/개들에게/태어날 개들에게 죄송하다//쥐새끼 같은 할 때/김재규가/차지철에게 버러지 같은 할 때/쥐새끼에게/버러지에게 죄송하다/하이에나/늑대 할 때/그들에게/그들의 탄자니아 초원에게 죄송하다/소위 잡초들에게 죄송하다/옥에 대한/돌에게 바위에게 죄송하다/지옥이라니 이글이글 지옥 유황불이라니/지하에게 죄송하다//언어는 이미 언어의 죄악인 것’
“개떡 같은 세상.”
가슴속에 돌덩이처럼 뭉쳐있는 말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직유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면 은유는 잘 다듬어진 보석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은유 회로를 통과한 말들은 굳어버린 사고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닌다. 뱀이면 어떻고 코끼리면 어떤가? 장미나 여우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모든 은유의 문이 열릴 것이다.
노시인의 직유와 언어에 대한 사죄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삶은 빚투성이다. 특히 언어로부터 빌려온 부채는 너무나 크다. G 레이코프와 M 존슨이 쓴 ‘삶으로서의 은유’는 철학과 언어학에서 주류로 간주돼 온 객관주의가 실제 언어와 사고의 많은 부분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간과할 때에만 가능한 견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은유가 언어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가슴 깊이 동의한다. 이 책을 통해 언어에 대한 부채감을 조금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반대일 수도….
김창완 가수·탤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