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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이 한줄]아는가, 세월이 흐를수록 아픈 기억이 있다는 것을

입력 | 2017-01-09 03:00:00


《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소년이 온다(한강·창비·2014년) 》
 
 전남 장흥군에 있는 외갓집에 내려갈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총을 멘 시민군이 “먹을 걸 좀 나눠주실 수 있느냐”며 화물트럭을 타고 찾아왔고, 외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감자나 고구마, 심지어는 솥에 남은 찬밥까지 긁어서 비닐봉지에 담아줬다는 내용이다. 트럭에 탄 사람 중에는 당시 중학생이던 막내 외삼촌 또래로 보이는 까까머리 소년도 있었다는 부분에 다다르면 할머니의 목소리는 귓속말을 하듯 작아지곤 했다.

 그 까까머리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책 속의 동호처럼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았다가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붙잡혀 흰 뼈가 드러날 때까지 모나미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돌리는 고문을 당했을 수도 있다. 대소변을 지릴 때까지 흠씬 두들겨 맞거나 손톱 열 개가 다 뽑힌 채 찌는 듯한 좁은 감방에 갇혀 며칠 밤낮을 고통 받았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아물지 않는 기억에 관해 얘기한다. 저자는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된다고 강조한다. 늦둥이 막내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여성,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기억은 너무 선명하고 강렬해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과거가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재이자 미래를 지배한다. 이들에게 “이제 그만 잊고 새 삶을 시작하라”는 말은 흰 뼈를 파고드는 모나미 볼펜처럼 고통스럽다.

 1일 박근혜 대통령은 예정에 없던 신년 기자간담회를 연 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두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요”라고 말했다. 1000일 전 일이 선명할 많은 사람들에게 또 한 번 상처를 남긴 셈이다. 기억은 아물지 않고 남는다. 그런 기억을 가진 이들이 치유되길 바라며 이 책이 널리 읽혀지길 바란다.

강성휘 기자 yol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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