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아무말러’를 해시태그로 단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하하.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편이긴 해요.”
얼마 전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 방송 일부다. ‘별 소리 다 한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이나 술술 내던지는 DJ를 향해 청취자들은 ‘프로 아무말러’란 신조어로 그의 화법을 장난스럽게 지적했다. 그런데 청취자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꽤 그럴싸했다.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말하다보면 사람들과 예상 밖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고, 연예인으로서 필요한 창의성까지 나름대로 키워진다는 설명이었다.
어느 조직이건 회의 때마다 지겹게 하는 게 ‘브레인스토밍’이다. 거창한 단어지만, 아무 생각이나 자유롭게 말해보자는 거다. 이렇게 해도 성에 차는 ‘아무 말’이 안 나오자 ‘랜덤 워드(Random Word)’라는 아이디어 도출법까지 나왔다. 방법은 간단하다. 신문에 볼펜을 떨어뜨리거나 책의 한쪽을 펴 나오는 단어를 선택한다. 그러고는 이 단어를 생뚱맞더라도 조직의 고민이나 과제에 연결시킨다. 백날 “아무 말이나 해봐”라고 해도 기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니 더 아무 말이나 나오도록 고민한 결과다. 이처럼 ‘아무 말’은 개인은 물론이고 조직이 창의적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다.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다는 게 참 슬프더라고요.” 지난해 12월 개봉한 재난 영화 ‘판도라’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원전 폭발’이라는 소재를 다룬 사회비판적 영화를 만들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 역시 지난 대선 때 특정 후보를 지지해 이념 성향을 분석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블랙리스트라는 흉흉한 소문 탓에 그러지 않으려 해도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게 가장 속상했다”고 전했다.
새해에도 블랙리스트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명단에 무려 1만 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올랐다는 얘기도 흘러나오니, 한심하면서 만드는 쪽도 참 힘들었겠다 싶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데 영향을 미쳤든 아니든, 적잖은 문화계 종사자들은 그 소문과 존재만으로도 ‘아무 말이나 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는 거다.
출근해보니 책상에 책 한 권이 올려져 있다. 영화담당 앞으로 전달된 ‘한국영화 역사 속 검열제도’란 신간이다. 책에는 그야말로 아무 말이나 할 수 없었던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사회를 어둡거나 비판적 시각으로 그렸다는 등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검열당한 사례들이 나열돼 있다. 책에서 언급한 검열의 역사는 대략 1980년대에 멈춰 있지만, “남의 가위질보다 눈에 안 보이는 자기 검열을 거쳐 ‘셀프 가위질’을 하던 나 자신이 더 무서웠다”는 게 최근 만난 영화계 인사의 말이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