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외교 부서였던 총리아문.
1874년, 창덕궁 대궐.
국왕과 영의정, 좌의정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제2의 임진란인가, 아니 정유재란에 이어 제3의 왜란이 오는가. 그 정보는 일본이 아니라 반대편 중국으로부터 왔다.
‘상국(上國)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여겨 이렇게 먼저 알려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회신에는 정성을 다해 감사의 뜻을 써보내야겠습니다.’(승정원일기 1874년 6월 25일자)
상국이란 청국을 뜻한다.
‘섬 오랑캐가 서양 오랑캐들과 더불어 교통을 한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우리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의정의 말처럼. 조선이 일본과 서양의 동향을 얻어듣는 것은 중국을 통해서일 뿐이다. 전란이 닥친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막 벗어난 22세의 국왕은 말한다.
영의정은 조심스레 다음과 같은 요지로 답한다.
‘임진년 왜란에 우리 백성은 군대를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된 까닭에 처음에는 공갈로 겁을 주면 그냥 달아나 흩어지는 일이 있었지만, 섬 오랑캐를 겪은 뒤로는 전력이 비슷해졌고, 근년에는 양요(洋擾)를 겪어 서양놈들의 장단점을 파악했으니 오늘날 군사력은 임진왜란 당시에 비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의정은 옛말을 인용한다.
‘태평한 날이 오래되다 보면 사람들이 교만하고 나태하고 물러빠져 약해져서 마치 아녀자처럼 집 밖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전투에 관한 말이 나오면 목을 움츠리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귀를 막고 안 들으려 한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통보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조선정벌론은 수시로 고개를 들고 있었고, 다음 해 일본 군함이 조선 해역에서 무력충돌을 유도하면서 결국 강화도조약을 관철시키기에 이른다.
중국이 보내온 그 문서의 어감이 어떠하더냐고 국왕은 묻는다. 영의정은 다소 흥분한 어조로 답한다.
‘총리아문(總理衙門)이 우리나라에 알리고픈 일이 있으면 그것만 언급하고 그칠 일이지 왜 통상 문제 등을 거론하며 마치 공갈치고 꼬드기듯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총리아문은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청나라의 정부 부서다. 중국이 왕조시대의 풍습을 오늘에 되살리듯 고압적 자세를 취하건 말건, 지금 한국 국회의원이 그 옛날 북경으로 향하던 사신처럼 자청하여 거기 동조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수구(守舊)라 할까.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