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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바라기] 20년 현역 무용수 “후배에 희망 되길”

입력 | 2017-01-10 03:00:00

<5>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20년째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지겹지 않을까? “밥 세끼 매일 먹는게 지겨울까요? 제게는 일상이죠. 다만 휴가 갈 때 마음 편히 놀지 못하는 건 아쉬워요. 다시 춤출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만약 은퇴한다면 어디 가도 아무 걱정 없이 놀 수 있어 좋을 것 같아요.”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몇 달 전에도 은퇴 생각을 했었어요.”

 올해 프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39). 그는 말이 필요 없는 국내 최고 무용수 중 한 명이다. 열 살 때 토슈즈를 신은 그는 1997년 당시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현재 그는 국립발레단 최장수 최고령 현역 무용수다.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만난 그에게 20주년 소감을 묻자 ‘은퇴’ 이야기부터 꺼냈다.

 “2∼3년 동안 양쪽 다리의 아킬레스힘줄 통증 때문에 고생했어요. 좋은 몸으로 무대에 서지 못해 그만둘까 생각했죠. 주위 분들이 그만두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무척 힘들었죠. 다행히 지난해 말부터 통증이 사라졌어요. 공연 때마다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올해는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만 들어요.”

 같은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박슬기(31), 김리회(30)와 나이 차는 꽤 난다. 수석무용수는 한정된 자리로 그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다른 무용수들에게 제가 눈엣가시일 수도 있겠죠. ‘똥차’ 취급을 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남을 많이 신경 쓰는 성격이에요. 한동안 스트레스 좀 받았죠. 무대에서 혹시 실수하면 ‘이제 김지영은 안 되겠네’라고 사람들이 생각할까 봐 무서워요.”

 1999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40세 즈음까지는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땐 세계적 스타가 되어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기사를 보여 주자 그는 크게 웃었다.

 “미쳤죠. 그땐 거칠 것이 없었어요. 제가 잘난 줄만 알았죠. 아마 그 당시는 제가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알죠.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 덕분에 이런 자리에 오르고 지금도 춤출 수 있다는 것을요.”

지난해 12월 25일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이 끝난 뒤 김지영이 받은 20주년 기념티셔츠와 케이크. 김지영 제공

 2002년부터 2009년까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다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35세에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언제까지 현역으로 활동할까?

 “그땐 정말 한국에서 발레를 마무리하고 싶어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아요. 그때보다 4년을 더 하고 있네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다만 조그마한 소망은 있어요. 제 은퇴 공연에서 제 아이가 나와 꽃다발을 전해 주는 장면을 꿈꾸고 있어요. 아직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이래요. 하하”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은 그도 많은 시련을 겪었다.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학교 유학 시절 졸업 공연에서 어머니가 관람 도중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동안 잠만 잤을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2002년 네덜란드로 갔을 때도 발목 부상으로 5개월 넘게 춤을 추지 못했고 결국 2년 뒤 수술까지 받았다.

 “만약 인생이 순탄했다면 더 유명해졌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시련을 겪다 보니 공감 능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다른 무용수들이 아프거나 슬럼프를 겪으면 해결책을 줄 수는 없지만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으니까요.”

 슬럼프도 자주 겪고, 완벽주의자이지만 의지는 박약하고,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은 낮다고 밝힌 그의 목표는 소박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이 발레예요. 지금도 좀 더 춤을 잘 추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오래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 ‘나도 춤을 오래 출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배역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무대에서 정말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춤췄어요. 일주일 넘게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죠. 여전히 관객에게 그런 감정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