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문화부 차장
며칠 전 영화관에서 라라랜드를 혼자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도 텅 빈 것 같은 모순된 감정에 젖었다. 내가 꿈꾸던 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을까? 마누라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겠지만, 잃어버린 꿈과 사랑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라라랜드는 1950∼60년대 뮤지컬 영화의 매력을 마법처럼 되살렸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고민은 요즘 밀레니얼 세대의 그것에 더 가깝다. 예전 영화 속 커플들은 어떤 어려움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사랑을 쟁취하고야 말았던 것과 달리, 라라랜드의 남녀 주인공은 사랑에 빠졌지만 꿈도 포기할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 화려한 군무와 탭댄스가 눈요깃거리지만 내 가슴에 남은 것은 남자 주인공의 말이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 오디션을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여자친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는 인생이 내게 던지는 펀치야. 코너에 몰리더라도 펀치를 절대 피하지 않아야 해. 내가 위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마지막에 카운터펀치 한 방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야.”
삶의 펀치에 두들겨 맞아도, 절망에 빠져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도 결국 쓰러지지 않는 것은 자존감 때문이다. ‘이 한 방에 쓰러질 내가 아니다’라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베스트셀러 ‘자존감 수업’의 저자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윤홍균은 “자존감은 집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공격하는 수많은 비난과 비교, 열악한 외부 상황은 일종의 악천후다. 아무리 현실이 고돼도 집이 안락하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새해 동아일보 문화부가 연재하고 있는 ‘희망바라기’ 시리즈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 데뷔 20년을 맞은 발레리나 김지영은 “무릎 수술 등 숱한 시련을 겪다 보니 남들과 다른 공감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며 현역 최고령 무용수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몽골에서 기타 하나로 외로움을 달랬던 남매 가수 ‘악동뮤지션’은 “별(희망)은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사라지지 않아”라고 노래한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쏟아지는 펀치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에게도 개혁의 기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1997년 외환위기 때 민주화와 경제개혁을 이뤄서 지난 20∼30년을 버텨 왔듯이, 올해의 총체적 위기에서도 대한민국이 새롭게 거듭나는 ‘반격의 한 방’을 준비할 것으로 기대한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