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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의 인사이트]트럼프타워에 일본 老정객이 둥지 튼 이유

입력 | 2017-01-11 03:00:00


최영해 논설위원

 미국 대선을 6개월 앞둔 지난해 5월 일본의 한 야당 원로 의원이 뉴욕 맨해튼의 트럼프타워에 세를 냈다. 뉴욕 5번가의 58층짜리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트럼프타워는 그때만 해도 권력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꼭대기 3개 층 펜트하우스에 도널드 트럼프와 가족들이 살고 있고 선거캠프도 이곳에 뒀지만 트럼프 당선을 점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금 트럼프타워 26층엔 정권인수위원회 사무실이 있다.

호랑이 잡으러 굴로 간 아베

 일본 노(老)정객이 비싼 임차료에도 이곳에 둥지를 튼 이유는 트럼프 사람들과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 당시엔 힐러리 클린턴 대세론이 압도했지만 일본은 트럼프에 대한 끈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트럼프타워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했으며,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트럼프 측근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은 그는 뉴욕과 도쿄를 수시로 오가며 트럼프 당선 이후 바뀔 미국에 대비했다. 닥쳐올 트럼프 시대를 대비해 일본은 이렇게 보험을 들었다.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 일본대사는 대선 때 클린턴뿐 아니라 트럼프에게도 집요하게 접근해 촘촘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015년 4월 29일 아베 총리가 워싱턴에서 상하원 의원을 모아놓고 의회 합동연설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의 대미 로비 창구인 사사카와 평화재단의 힘이 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정보국장(DNI)을 지낸 데니스 블레어가 재단이사장으로 오바마 행정부의 인맥과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9일 뒤에 아베 총리가 외국 정상으론 처음으로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고, 취임 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파트너가 아베 총리라는 사실은 일본 정부의 전방위적인 외교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욕먹는 아베지만 그의 주변 강대국 외교는 얄미울 정도로 집요하면서도 발 빠르다.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말인 지난해 미일 정상의 히로시마와 진주만 교차 방문으로 과거 침략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으면서도 국제무대에선 역사적인 화해 메시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주일미군 분담금 인상 등 강경책을 예고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전 과거사 정리와 함께 화해 평화 무드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아베는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4번이나 만났다. 소치와 이세시마,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외국 정상 중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인 야마구치로 초청해 우의를 다졌다. 푸틴이 약속 시간보다 일부러 3시간이나 늦게 도착해 체면은 구겼지만 쿠릴 열도 4개 섬을 돌려받으려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지도자의 모습을 아베는 국민에게 보여줬다.

세계무대에 한국은 없다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 문제를 놓고 한일 간에 서로 낯을 붉히고 있다. 아베 총리까지 나서 “한일 합의에 따라 10억 엔을 출연했다”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6일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과의 전화 통화 뒤 나온 발언이라 미국 동의를 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베가 주변 강대국 지도자들을 수시로 만나며 외교 전선을 누빈 것이 소녀상 문제 해법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 걱정이다.

 어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일본에 “언행을 자제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버스 지나간 뒤에 손 흔드는 격이다. 지금 세계 외교무대에선 한국은 없고 일본 목소리만 선명하다. 존재감 없는 대통령에 게으르고 무기력한 정부가 자초한 일이다. 국제무대에서 종횡무진하는 아베를 우리는 언제까지 손놓고 보고 있어야만 하나.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