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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우지희]여행의 행복한 여파

입력 | 2017-01-12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3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직장인에게는 꽤나 긴 여행이라 행여 낯선 곳에서 대단하고 거창한 일이라도 생기려나 싶었는데, 그런 들뜬 마음이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매치기로 악명이 높은 여행지였지만 그 흔한 도난사고 한 번 당하지 않아 무탈하고 조금은 심심하게(?) 여행을 끝마쳤다. 오히려 여행 막바지에는 힘들게 일할 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회사 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무실이 있는 동네만 아니면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막상 13시간 넘게 날아와 먼 타국에 있으니 희한하게도 그토록 고달팠던 노동현장이 그리웠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3주간 보던 파란 하늘 대신 뿌연 미세먼지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귀국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항 안에 있는 한식당에 가서 밥부터 시켰다. 해외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칼칼하고 매운 양념의 비빔냉면을 한 그릇 주문하고 앉아 있자 종업원이 컵과 물을 내왔다. 그 당연한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음이 났다. 여행지의 모든 식당은 물값을 따로, 그것도 아주 비싸게 받았기 때문이다. 빈 컵에 물을 따라 시원하게 원샷을 하는데 심지어 맹물이 아닌 보리차라는 사실에 감동은 두 배가 되었다. “캬, 이 맛이지!” 하며 단숨에 물 한 잔을 더 비워냈다. ‘이 맛있는 물 한 병을, 아니 몇 병이고 공짜로 내주는 곳에서 살았었구나’ 하며 뜨내기손님을 받는 공항 식당의 그 맛없는 냉면을 참 맛있게도 먹어 치웠다. 맛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식이라면 무엇이든 다 꿀맛이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출근을 하고 평범한 날들을 보내다가 여느 때처럼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게 된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이 서럽고 맥이 빠졌을 텐데, 문득 여행지에서의 식사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희한하게 기분이 좋았다. 몇 주 전 어느 날 낯선 도시의 공원 벤치에 앉아 맛없고 비싼 샌드위치와 물병을 손에 쥐고 끼니를 해결하던 것이 참 행복하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이게 고급스러운 브런치와 다를 게 없다’며 우적우적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사진을 찍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해 의식조차 없었던 일이나 오히려 조금 서럽고 슬프게 느끼던 일이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굉장히 감사하고 즐겁게 여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에서의 업무효율도 한결 높아졌다.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가 쉽게 떠올랐고 조금 거슬리는 일들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여행지에서는 좀 불편한 일들도 여행이라는 이유만으로 툭 털고 넘어갔기에,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이게 되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무료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긍정적인 태도를 얻으려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텔방의 바스락거리고 푹신한 침구, 위대한 예술가들의 어마어마한 작품들, 이국적이고 들뜬 거리의 분위기들, 색다르고 놀라운 맛의 음식들 모두 여행의 큰 매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즐긴 그 끝에는 결국 내가 딛고 서 있던 삶의 터전이 얼마나 값지고 멋진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마치 원효대사의 해골 물을 마신 것처럼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 진부한 이치를 깨닫고 오는 것이다.

 분명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이 지루한 날들에서 해방되기를, 새로운 곳에서의 짜릿함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벗어나기를 바라는 곳, 즉 돌아올 곳이 있기에 더욱 떠나고 싶어진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배웠다. 당분간 이 여행의 기운으로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 본다.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