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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꿈꾸던 세상은 어디에… 보고 싶다, 친구야”

입력 | 2017-01-14 03:00:00

[토요이슈]14일 30주기… 고교-대학 동기들이 기억하는 박종철




따뜻하고 올곧은 청년 박종철 씨의 죽음은 엄혹한 군부독재시대를 종식시킨 거대한 폭발의 도화선이 됐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보이스카우트 여행 때 박 씨(아래), 1988년 2월 26일 서울대 졸업식에서 박 씨를 추모하는 서울대생들, 1987년 2월 7일 부산 사하구 사리암에서 오열하며 타종하는 가족들, 같은 해 1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추도 미사를 진행하는 고 김수환 추기경. 동아일보DB·김치하 씨 제공

 30년 전 오늘(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 씨(당시 22세)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숨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그의 죽음과 정부의 은폐, 조작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많은 사람에게 박 씨는 민주화를 위해 산화한 영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함께한 이들은 그를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로, 한편으로는 일탈을 꿈꿨던 장난꾸러기로 기억한다. 그 시절 누구에게나 한 명쯤 있을 법한 그런 친구가 바로 ‘박종철’이었다.



흰 얼굴에 큰 안경 쓴 종철이

 1980년 부산 중구 보수동.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야 겨우 교문에 이른다고 해서 ‘언덕 위의 파란 집’으로 불리던 혜광고가 있다. 당시 혜광고는 부산의 신흥 명문고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커다란 안경. 박종철은 시커먼 얼굴의 또래들 사이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겉모습처럼 순둥이는 아니었다. 종철과 그의 친구들은 참 열심히도 놀았다. “우린 너거들 가르칠 실력이 안 된다. 공부는 인마 니가 알아서 해라”라며 휘두르는 선생님의 몽둥이를 견디면서.

 친구였던 종철과 김치하(52·현 철강업체 부사장)는 둘 다 공부 좀 하는 편이었다. 무조건 공부가 첫손가락에 꼽히던 시절. 어른들은 ‘모범생’인 두 사람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주 일탈을 감행했다. 도서관에 간다고 말한 뒤 친구의 하숙집에 가서 담배도 피우고 소주도 홀짝거렸다. 다대포해수욕장에서 교련 사열이 끝나면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근처 포장마차에서 라면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종철은 조금 달랐다. 그는 ‘학생운동’에 눈을 좀 일찍 떴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중학생이었던 종철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가스를 흠뻑 뒤집어쓴 채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랬던 종철도 고3이 얼마 남지 않자 여느 친구들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집 앞 독서실에 종일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날도 많았다. 다행히 성적은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 1983년 2월 23일 종철과 치하는 함께 서울의 종로학원에 들어갔다. 재수 시절 종철은 수시로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저께 서울에는 봄눈이 왔습니다. 봄눈! 정말 생소한 단어지요.”

 “최악의 점수가 나왔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종철이

 이듬해 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재수 시절 틈틈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대학생활과 함께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다. 1학년 가을에 동기인 신효필(52·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 등과 함께 충북 영동군으로 농활을 떠났다. 종철은 “농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농활 마지막 날. 농민들은 수고했다며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나눠줬다. 막걸리 한 잔을 생각했던 종철과 친구들은 기쁜 마음에 열심히 포도주를 마셨다. 얼마 안 가 곳곳에서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종철은 친구의 등을 두드렸고 친구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학생운동을 했지만 그는 과격하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데모를 하거나 말거나 가리지 않고 친구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다. 엠티(MT)를 가면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1987년 1월 생전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 속 그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허름한 식탁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단정했고 입술은 빨갰다. 열성적이지만 아직 어린 대학생이었다.

 종철은 치하와 함께 교내 서클인 대학문화연구회(대문)에 몸을 담았다.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지하 운동 서클이었다. 1986년에는 과 학회지에 ‘85학년도 2학기 학생운동을 정리하며’로 시작하는 글을 썼다. 그해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구속 당시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별로 할 말이 없군요.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누나야, 지난번에 언쟎게(언짢게) 올라와서 미안하다. (중략) 참, 곧 어버이날이구나. 내 몫까지 니가 좀 해주라.”



“하여튼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종철이

 겨울방학이던 1987년 1월 13일 종철의 대학 동기 이윤정(51·여)이 학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종철이와 친구들과 오랜만에 인사를 하고 새 학기 학생회 운영 방안, 수강신청 계획을 놓고 한창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종철이가 일어섰다. 일본어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웬 일본어? 네가 일본어를 배운다니 이상하다.”

 “하여튼 난 간다.”

 그렇게 사무실을 나선 종철은 수업 후 신림9동(지금의 대학동) 하숙집으로 돌아가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곧바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뒤 이튿날 숨졌다.

 종철의 죽음은 친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삶의 행로까지 바꿨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종철이가 끌려가기 며칠 전 통화를 했었다”고 기억했다. 30년이나 지난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미안함에 고개를 떨궜다. 이윤정 씨는 “‘종철이는 왜 죽어야 했고,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며 “그만큼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다시 살아나는 ‘박종철 정신’

 박종철의 죽음은 고문으로 인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통제 방식의 모순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상징이었다.

 당시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조한경 씨(당시 경위)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박종철 연행 하루 전 김종호 당시 내무부 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일정이 있으니 3월 전까지 모든 사건을 끝내라”고 지시했다.(이후 치안본부 등이 주도한 은폐·조작 사건으로 밝혀짐.)

 경찰은 급한 마음에 무리수를 뒀다.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서울대생 박종운 씨(56·전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의 소재를 파악한다며 박종철을 잡아들였다. 그는 정말 박 씨의 행방을 몰랐지만 경찰은 가혹하게 고문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사건의 은폐·조작에 검찰과 국가안전기획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2009년에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의해 밝혀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이 사건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혹시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등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학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과거 독재정권의 산물이 청산되지 않는 한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종철 30주기인 14일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등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과 서울 용산구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각각 참배와 추모제를 연다. 모교인 부산 혜광고 동문들은 중구 남포동에서 추모 음악회와 사진전을 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6월민주항쟁30년사업추진위원회도 올 한 해 동안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한다.

 2017년 두 번째 촛불집회가 열리는 14일 서울 광화문광장 북쪽 무대에서는 ‘민주열사 박종철 30주기 추모 전시회’가 진행된다. 박종철. 그가 살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과 촛불집회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홍정수 hong@donga.com·권기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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