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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D/ Opinion]세월호 참사 1000일

입력 | 2017-01-16 14:10:00

육성철의 Human Space(5)




세월호 참사 997일, 143번째 금요일이다. 진도 팽목항엔 2년8개월째 노랑 리본이 펄럭인다. 섬으로 떠나는 고속 페리와 진도 읍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시차를 두고 항구를 빠져나갔다. 선착장 입구에 조성된 ‘세월호 기억의 벽’엔 시민들이 쌓아둔 과자, 커피, 소주, 콜라, 꽃다발이 수북했다. 그 옆으로 텅 빈 ‘기다림의 의자’가 있고, 그 앞에 “가슴으로 우는 우리를 꺼내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휘날린다.

2014년 봄부터 가을까지 팽목항은 통곡의 바다였다. 295구의 시신이 육지로 올라올 때마다 비명이 울렸다. 주검을 확인한 유족의 오열 속에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가족의 불안감은 갈수록 커졌다. ‘혹시 내가 마지막에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밤낮으로 그들을 괴롭혔다. 그해 가을 수중 수색작업이 종료되고 팽목항엔 8가족이 남았다. 2년이 흘렀으나 그 숫자는 줄지 않았다.

팽목항 시민분향소에 놓인 검정고무신 8켤레, 노랑 고무신 1켤레. 미수습자 9명을 기다리는 고무신이다.

팽목항 시민분향소 오른편 구석엔 고무신 9켤레가 놓였다. 검정 고무신 8켤레, 노랑 고무신 1켤레, 검정색은 어른이고 노란색은 어린이의 것이다. 공식적으로 9명(그중 단원고 2학년생은 4명)의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희생자 곁에서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분향소 외벽에 걸린 ‘세월호 참사 사실기록 타임라인’에서도 미수습자와 희생자는 한 묶음이다. “바다여, 제발 잠잠해다오”라고 적힌 현수막 속 증명사진이 9명의 실체를 애잔하게 드러낼 뿐이다.

바다의 기다림, 교실의 기억

미수습자 가족들이 우편물 발송 작업을 한다. 왼쪽부터 조은화 학생 엄마 아빠, 허다윤 학생 엄마 아빠



미수습자 가족들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우편물을 포장한다.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학생과 2반 허다윤 학생의 부모다. 그들은 봉투에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넣고 그 위에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편지를 동봉했다. 여야 국회의원과 종교단체에 보내는 새해 연하장이라고 했다. 참사 1000일을 맞는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 행간에 묻어 있었다.

‘엄동설한의 바다 속에 떨고 있을 제 딸을 찾아주세요. 제발 우리 딸을 만지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서럽습니다. 내 아이가 아직 바다 속에 있는데 못 데리고 오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은화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 조남성 씨(54)는 “속 한 번 썩인 적이 없는 딸에게 부모로서 잘해준 기억이 없어 원통하다.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화가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짐을 너무 많이 싸는 게 아니냐?”고 물은 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딸은 그냥 웃을 뿐 아무런 답이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일찍 출근하느라 딸이 집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DMB로 사고 소식을 들었다. 은화는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바꾼 휴대전화가 배가 기울면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까지 딸은 엄마에게 알렸다고 한다. ‘만일 그때 빨리 탈출하라는 방송이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사고 소식이 알려진 그날 밤 팽목항은 아비규환이었다. 안산에서 급히 내려온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입히려고 두꺼운 옷을 잔뜩 준비했지만, 정작 그 옷을 걸친 자식들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선착장으로 밀려드는 사나운 파도를 보고 딸의 죽음을 직감했다. 주위에서는 에어포켓과 다이빙벨에 희망을 걸었지만 그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예감대로 골든타임을 지나 바다 위로 나온 생존자는 없었다.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긴급 재난 구조체계를 갖추지 못한 국가의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경험도 없고 설비도 없는데 무슨 수로 바다 속에서 사람을 구하겠어요?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만 많았지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었어요. 정부가 빨리 실패를 인정하고 인양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에게 세월호 인양은 단지 딸의 시신을 수습하는 문제 그 이상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우선 선체의 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바다 속 세월호는 100여 개 이상의 구멍이 뚫렸고 선체 곳곳이 잘린 상태다. 가로 세로 각각 1m가 넘는 틈새로 시신이 유실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는 주변의 우려에도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월 18일 금요일, 은화는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만일 무사히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면 은화는 다음 주 월요일 아침 평소처럼 ‘지각자 체크 도우미’로 친구들의 출석을 점검하고, 1교시 한국지리 수업 시간에 제주도 수학여행을 주제로 정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단원고 기억교실 벽시계. 4시 16분에 정지했다.

그러나 경기도 안산시 안산교육지원청에 마련된 단원고 기억교실 2학년 1반 벽시계는 지금도 4시 16분에 멈춰 있다. 학생들을 반갑게 만나야 할 유니나 담임선생님도 18명의 희생자들처럼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했다. 은화의 어머니 이금희 씨(48)는 “가족들의 삶도 그날 같이 멈췄다”고 말했다.

“은화한테는 심장 수술을 받은 23살 오빠가 있어요. 동생 일로 충격을 받아 학교도 그만두고 그냥 집에만 있어요. 엄마, 아빠가 여기서 지내다 보니 챙겨주지도 못해요. 오빠도 동생처럼 4월 16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단 하루라도 앞당길 수만 있다면’

단원고 기억교실 2학년 1반



다윤이는 언니와 친했다고 한다. 단원고 기억교실 2학년 2반 화이트보드엔 친언니의 글씨가 여러 군데 남아 있다. ‘내 동생 다윤아, 언니야. 많이 보고 싶어. 일찍 와 봤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해 많이’ 가족들 앞에서 늘 쾌활했던 언니지만 동생이 떠난 이후 말수가 줄었다고 한다. “그동안 미수습자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다 보니 고립감에 시달린 것 같다”고 다윤이 아버지 허흥환 씨(53)가 말했다.

다윤이 아버지와 어머니 박은미 씨(47)는 2015년 3월부터 팽목항에 상주한다. 아버지는 생업인 철제 가공까지 그만두고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산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날씨를 살피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일과다. 팽목항 기상 상태는 방송사 일기예보와 다를 때가 많아 아침 날씨에 따라 세월호 인양 작업 속개 여부가 결정된다.

“날씨가 맑으면 ‘오늘은 작업이 되겠구나’ 날씨가 흐리면 ‘오늘은 어렵겠구나’ 그걸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내요. 해 떨어지면 사방이 캄캄해서 어디 갈 데도 없어요. 철조망 없는 감옥이 따로 없지요. 빨리 끝내고 명절에 고향도 가보고 싶고, 가족들과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2학년 1반 교실에 걸린 2014년 4월 일정표. 18일 금요일, 학생들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다윤이를 애교가 많았던 딸로 기억한다. 퇴근 무렵 집 근처에서 만나면 옆에 딱 달라붙어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였다. 아버지는 딸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사주었지만 좀 더 잘해주지 못해 쓰리고 아프다. 꼭 한 번만이라도 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지금껏 말로 표현하지 못한 칭찬을 듬뿍 쏟아내고 싶단다.

참사 이후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차례를 지낸다. 아이들의 생일이면 가족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른다. 12월 이후 조류 때문에 당분간 세월호 인양 작업이 어렵다는 발표를 듣고도 그들은 팽목항을 떠나지 못한다. 단 하루라도 인양을 앞당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서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단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컨테이너에 마련된 식당에 모였다. 시민들이 보내준 떡, 육수, 양념으로 떡국을 끓여 점심을 차렸다. 세월호 참사로 동생과 조카를 잃은 권오복 씨(63)는 “이게 나라인가 싶다가도 시민들이 우릴 돕는 걸 보면 이 나라가 아직 살 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은화와 다윤이 부모도 둘러앉아 떡국을 먹었다.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서 1000일을 맞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은화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광화문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그나마 우리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다와 싸우면서 3년상을 치르고 있습니다.”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