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먼저 선물을 받게 됐다. 학점도 나갔고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는 제자들에게 받은 선물이라면 김영란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반장이 대표로 준 납작한 상자에는 모직 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며칠 후, 다른 출판사로 자리를 옮긴 한 편집자와 오랜만에 만났다. 간밤에 두 시간밖에 못 자고 나왔다고 하자 그녀가 왜냐고 물었다. 어떤 작가의 책은 일단 손에 들면 다 읽기 전까지 덮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줌파 라히리나 필립 로스 같은 작가들. 그날 밤을 새워 읽은 책은 필립 로스의 두 권짜리 장편 ‘미국의 목가’. 짧게 말하면 스위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한 한 가족의 몰락을 그린 작품이고, 더 상세히 말하려면 뛰어난 운동선수였던 그가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업의 품목이 장갑이었다는 것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 듯싶다.
정답은 엄지.
그는 “인간의 손의 아래쪽에 있는 손가락, 어쩌면 이게 우리와 다른 동물을 구별해주는 신체적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켤레의 장갑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많은 협업 과정에 대해서도. 사실 이 소설은 목가적이라기보다 강렬한 비애에 가깝다. 인물들이 삶을 겪어내는 방식으로 보면. 하긴 소설이란 그렇기도 하겠지. 어떤 사람들이 그 자신의 삶을 겪으면서 쓰러지고 넘어서고 다시 시작해보려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신나게 책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17년 차 편집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문득 이런 소리를 했다. “저는 소설이 제일 좋아요.”
소설 모임을 만든 학생들도 그날 누군가는 소설이 제일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정말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고. 이 혹한과 내핍의 시절에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책을 만들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추위가 덜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안쪽에 털이 촘촘하게 들어간 새 장갑을 끼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