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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서 만난 동갑내기 ‘운명의 벗’… 청진동 골방서 찬란한 인문정신 펼쳐

입력 | 2017-01-23 03:00:00

故 박맹호 선생 영전에 부쳐




고은 시인

 이 세상에 와서 벗이 없는 삶은 헛된 삶이다. 그런 벗의 첫자리에 박맹호 선생이 계신다. 그와 나는 동갑짜리다. 그와 나는 생애의 후반을 함께 지냈다.

 그런 박 선생이 눈감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멍할 따름이다. 서럽지도 않고 허전하지도 않다. 박정(薄情)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와 나 사이에는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운명의 무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1960년대 후반 제주도에서 돌아온 내 빈손은 막 책 세상에 나타난 박 선생의 빈손과 극적으로 만났다. 만나자마자 둘의 우연은 필연으로 바뀌었다. 거두절미로 둘은 정신의 쌍둥이로 살기 시작했다.

 속담의 ‘콩 한 쪽’은 둘의 일상이었다. 하루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호서 부호의 장남이라는 그의 신분은 무효였다. 철저한 자수성가의 길을 갔다. 그의 금실 좋은 부인은 집에다 약국을 차려 출판자금에 보탰다. 나는 문단의 우수한 동료들과 후배들을 불러들였다. 그래서 ‘청진동 시대’라는 한국의 문예부흥을 열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나오고 다음으로 ‘문학과 지성’이 나오는 동안 민음사는 그 중간에서 자아와 세계를 지향했다.

 첫 출발을 할 때는 무교동 다방 2층에서 편집하고 광고문을 기안했다. 그러다가 누구네 사무실 한 칸을 얻어 들었다. 이런 가난의 청진동으로부터 찬란한 청진동의 인문정신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관철동 시절로 접어들며 민음사의 전성기가 열렸다. 문학뿐 아니라 인문과학 전반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영역까지 출판의 지형이 넓혀졌다. 바야흐로 한국 출판의 표상이 된 것이다.

 이제 박맹호 선생은 이런 경륜을 회향(廻向·불교에서 자기가 닦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일)한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나와의 친분 때문에 세무사찰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민음사와 표피(表皮)의 거리를 두기도 했다. 이제 그의 대업은 출판문화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수성의 행로를 감연(敢然)히 갈 것이다.

 필생의 벗 고 박맹호 선생의 명복을 빈다.―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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