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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닭들의 침묵

입력 | 2017-01-23 03:00:00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나란히 입국한 미국발 하얀 계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한국 시장에 출하됐다.

 “달걀이 왔어요, 달걀.”

 미국에서 식량을 원조 받던 1950년대를 포함해 오랜 기간 동네 어귀에 복음처럼 울려 퍼지던 그 소리가 먹을 것투성이로 변모한 지금 한국에 느닷없이 복고풍 가락처럼 되살아났다. 쌀밥이 소원이던 시절에 계란은 귀한 음식이었다. 6·25전쟁이 있기 사반세기 전의 신문만 보아도 이 땅의 계란 품귀가 뿌리 깊은 것임이 나타난다.

  ‘덴마크는 인구 140만 명 중 일부 농가의 부업으로 매년 1억 원 이상의 계란을 수출한다. 중국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계란이 2천만 원가량 된다. 인구 1400만 명에 농가 270만 호인 조선에 양계(養鷄) 총수는 6백만 마리. 농가 한 집마다 평균 두 마리 남짓 보유하는 셈이다. 일본 농가 평균 9마리에 비해도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빈약하다.’

  ‘양계를 장려하라’는 제목의 독자투고다(동아일보 1925년 9월 10일자). 닭의 절대 수도 부족하지만 재래종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재래종은 평균 한 마리당 연간 70개의 알을 낳고 알의 무게는 11돈. 환산하면 41.25g인데, 지금 기준으로 소란에 해당하다. 이에 비해 개량종은 150∼200개를 산란하는데 무게가 월등한 16돈, 딱 60g인데, 요즘 말하는 대란을 넘어 특란이 시작되는 경계점이다.

 투고자는 개량종 닭을 집집마다 평균 11마리만 키워도 중국의 출하액에 육박할 것으로 보면서, 부업은 물론이고 전업으로도 유망하다고 권유한다. 그리고 낯선 양계의 방법이 소개된다. 종자는 물을 것도 없이 개량종인데, 미국산 백계(白鷄). 즉 흰 닭을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무 노하우.

  ‘우선 배수가 잘되는 남향이나 동향이라야 한다.’

 사람 사는 집에서와 같은 기준을 닭의 거주지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닭이 처한 현실과는 다르다. 닭의 주거환경에 대한 90년 전 교범은 이어진다.

  ‘앞면은 철망, 뒷면은 벽’. 철망은 알겠는데 벽은 무엇인가.

  ‘벽 뒤편에 나무판자로 숙소를 따로 만든다.’

 이를테면 일터와 거주가 분리되는 인간의 공간과 같다. 그렇게 하여 족제비 같은 천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다. 사방이 철망인 지금의 사육 공간과는 다르다. 

  ‘가는 모래를 깔아 모래목욕을 행하도록 하라.’

 날짐승에게 모래는 몸에 붙는 잡벌레를 떨치는 청결과 위생의 도구. 건강과 수명에 직결되는 필수항목인 것이다. 지금 조류인플루엔자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공장식 축사와는 사뭇 다르다. 닭의 권익 보호가 인권과 결국 연결된다는 강조조차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닭의 위생 건강 유지 수칙은 이어진다. 그중 겨울 편이 인상적이다.

  ‘석회(칼슘)와 채소를 듬뿍 먹이고… 감기가 걸렸을 때는 감기약을 먹인다.’

 그때의 닭과 지금 닭은 섭생의 질이 다르다고 할까. 지금 이곳의 닭이 처한 무자비한 생존조건과 그에 기대어 사는 인간 형편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세월을 거쳐 어느덧 풍성한 계란의 나라가 된 한국은 부득이 이번 닭의 해 설날을 미제 달걀과 더불어 쇠게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없었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지 모른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