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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의 오비추어리]독일 대통령의 선견지명

입력 | 2017-01-25 13:17:00


로만 헤어초크 전 독일 대통령. 사진 동아DB

이유종 기자


1990년 10월 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에 선출된 로만 헤어초크(Roman Herzog) 전 독일 대통령(재임기간 1994~1999년)이 10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헤어초크 전 대통령은 법학자 출신 정치인이다. 나치 시절인 1934년 4월 5일 남부 바이에른 주 란츠후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수재였다. 1958년 뮌헨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65년부터 베를린자유대, 슈파이어행정대학원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1970년 우파 기독민주연합(CDU)에 입당했다. 1970년대 라인란트-팔츠 주 총리를 지낸 '통일 총리'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조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73년 라인란트-팔츠 주 의원에 당선됐다. 1978~83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문화체육부 내무부 장관을 거쳤고 이 기간 동안 CDU 대표도 지냈다. 1983년에는 다시 법조계로 돌아가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돼 1987~94년 연방헌법재판소장까지 지냈다. 이후 콜 전 총리의 추천으로 독일 제7대 대통령에 올랐다. 학계, 정계, 법조계를 아우르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의원내각제의 독일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가 아니라 연방하원 의원, 주의회 임명 선거인단 등이 선출하는 간선제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며 입법 과정에서 법안이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될 때 법률 발효를 위한 서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독일 대통령은 주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공공연설에서 '메시지 정치'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현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정부, 의회, 국민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로만 헤어초크 전 독일 대통령. 사진 동아DB


헤어초크 전 대통령은 1997년 베를린 연설에서 독일의 경기침체와 아시아 국가들의 활력을 비교하며 관료주의, 규제, 변화 거부 등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당시 독일은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돼 실업률이 두 자릿수에 달했다. 통독 이후 극심한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던 독일은 '유럽의 환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헤어초크는 "어떤 계획을 추진해도 규제라는 늪에 빠질 위험이 있다"며 노동시장, 조세제도, 건강보험, 공공인력 관리. 각종 규제 등의 개혁을 촉구했다. 이어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독일을 위해서 기다려주지 않는다. 독일에는 충격이 필요하다"며 "우리의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들은 무엇이 옳은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 또 그런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의 선견지명은 옳았다. 이듬해 16년 만에 중도좌파인 사민당(SPD) 출신 총리에 오른 게하르트 슈뢰더에 의해 실업 및 연금 삭감, 노동시장 개혁, 조세 개혁 등으로 현실화됐다. 슈뢰더는 헤어초크가 속한 CDU의 경쟁 정당인 SPD 소속이다. 그는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 출신으로 독일 중도좌파의 희망이자 자수성가형 인물로 헤어초크가 제안한 인기 없는 정책들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독일은 지난해까지 7년 연속 플러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경제 기관차'의 지위에 다시 올랐다.

헤어초크 전 대통령은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를 기억해야 한다고도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일인 1월 27일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로 지정하도록 만들었다. 나치 점령으로 고통 받은 폴란드 등 이웃 국가에도 용서를 구했다.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헤어초크에 대해 "독일의 자아상을 형성하고 우리 사회 내부 소통을 도운 매우 두드러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차기 대통령이 유력한 프랑크-발터 슈타인 마이어 외무장관은 "그는 어려운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심오한 유머 감각을 놓친 적이 없는 솔직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독일 대통령들은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정치인들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2년 정파와 무관한 무소속 요아힘 가우크 전 슈타지문서관리청장을 대통령에 추천했다. 가우크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의 강력한 재임 요청에도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시민 대통령' 가우크는 재임 기간 동안 인권, 독일의 책임, 민주주의 위협 등을 강조해왔다. 국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대통령의 모습이라 할만하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