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71세 재벌을 가르친다고?
선거 캠페인 때야 무슨 말을 못 하겠어. 당선돼선 달라질 거야. 트럼프 내각의 합리적 현실주의자들을 봐. 트럼프라고 별수 있어? 많은 이들이 이렇게 예상했다. 지난해 말 한국을 다녀간 공화당 인사들도 한결같이 “선거 땐 으레 말이 거칠어지는 법 아니냐”고 했다. 심지어 “트럼프를 잘 가르칠(educate) 테니 염려 마라”라고 한 공화당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왜 이렇게 몰아치는 걸까. 타고난 승부사로서 ‘기습적 충격요법’의 효과를 익히 잘 아는 트럼프다. 자신의 책 ‘불구가 된 미국’에 “기습은 승리를 안긴다. 상대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에게 만능 외교정책은 없다. “언제나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절대 패를 보여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당분간 트럼프발 충격파는 계속될 것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예측하기 힘든 싱크빅(think-big·통 큰 생각)으로 불확실성을 높인 뒤 지렛대(leverage)로 판을 흔들고 거친 파이트백(fight-back·반격)으로 후려쳤다. 일례로 중국을 상대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렛대로 흔들며 중국의 항의에 거칠게 받아쳤다.
한 협상 전문가는 트럼프를 “땅 냄새를 정확히 맡는 사자”(안세영 ‘도널드 트럼프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에 비유한다. 남들이 흑인과 히스패닉에 집중할 때 ‘백인 표밭’ 냄새를 정확히 맡은 것도 그의 동물적 후각 덕분이다. 당장은 멕시코나 중국이 사자의 ‘먹잇감’이지만 곧 한국 차례가 될 것이다. 이미 “일자리를 뺏는 최악의 협상”이라며 한미 FTA 재협상을 외쳤고,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왜 100%는 안 되느냐”며 분담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런 사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미국 내 네트워크를 넓히고 꼼꼼한 대차대조표를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당장은 좋은 인상부터 심어주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본은 벌써 발 빠르게 그런 전략을 펴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국정 공백 속에서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트럼프를 상대할 준비가 돼 있을까.
현재 대선 주자 지지율 1위는 문재인이다. 최근 미국 외교전문지엔 ‘문재인이 당선되고 트럼프가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면 한국은 미군 철수를 내버려둘 수 있다’는 기고문이 실렸다. 이에 문재인은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논점은 내가 당선되면 협상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며 ‘당당한 협상’을 강조했다. 실제로 트럼프라면 한국에 가장 민감한 ‘주한미군 카드’를 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사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먼저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게 과연 협상에 유리할지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