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성은 프리랜서 VJ
가장 먼저 한 건 실패에서 교훈 얻기. 솔로대첩의 비극이 떠올랐다. 남자와 기자와 비둘기만 모였던 광화문광장. 성비를 맞추기 위해선 여심을 사로잡아야 했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뭘까? 어딜 가나 ‘여초’였던 내 삶을 돌이켜보다 그 답을 찾았다. 밥 다음으로 가장 많이 소비한 분야, 그것은 문화예술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개봉하는 독립영화는 모조리 챙겨보고, ‘핫’한 밴드의 공연은 놓치지 않던 문화덕후의 삶을 살면서 느낀 건 그곳엔 온통 여자뿐이라는 사실. 문화와 데이팅을 합쳐 볼까?
학교 게시판, 취준생 카페, 영화 동호회 등에 글을 올렸다. 이상한 사람이 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발 한 명이라도 신청해라 하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하나둘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남녀 3 대 3이라는 환상적인 성비로 만남이 성사됐다. 약속 당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영화관 앞에 서 있는데 이럴 수가. 생각보다 다들 너무 괜찮은 거다! 모두들 솔로였고, 우린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연락처도 주고받고 단체 카톡방도 생겼지만 뭔가 애매했다. 목적이 ‘영화관람 및 감상평 나누기’다 보니 일대일로 연락하기도 머쓱했고, 애써 단톡방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다 보니 지치기 시작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 얘기를 듣던 선배가 조언했다. “야, 솔직히 연애 대상으로서의 남자 만나고 싶은 거 아냐? 그럼 그냥 영화 보고 바로 스피드 데이팅 해.”
스피드 데이팅? 그건 미국 드라마에서나 보던 신문물 아닌가? 일단 한번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것이 영화 스피드 데이팅 ‘시작은 영화’다. 영화로 풀어가는 12명의 이성과 7분간의 데이트를 콘셉트로 24명의 남녀가 함께 영화를 보고 스피드 데이팅을 했다. SBS ‘짝’을 무수히 돌려보며 남녀관계를 고찰했고, 영화 큐레이션과 콘셉트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람들 모으는 게 우선이니 천만 영화로 할까?” “아니! ‘명량’ 같은 영화를 보고 누가 데이팅을 하고 싶겠어….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로 하자. 연애 감정이 싹틀 수 있는 다양성 영화!” “안 그래도 독립영화관에 사람들 없는데…. 사람들이 모일까?”
결과는 대박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홍상수의 영화부터 ‘족구왕’까지, 웰메이드 다양성 영화 위주로 하니 여성들의 참여가 폭발적이었다. 여자들이 모이는 데이트 시장엔 남자들도 자연스레 모이는 법! 매 회 콘셉트도 바꿨다. 대학 1, 2학년생을 대상으로 교복을 입고 ‘클래식’을 보기도 했고, 나이 때문에 참여를 머뭇거리는 30대를 위해 미팅 못 하는 나이 특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상영하기도 했다.
솔로 여성 2명이 작은 카페를 빌려 시작한 이벤트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 800여 명의 남녀가 짝을 찾을 기회의 장이 됐다. 그 과정에선 커플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안 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건 아마 오랜 시간 솔로로 지내며 ‘인기 없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기획자의 배려가 프로그램에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1년이 지난 일이지만 요즘도 가끔 문의가 온다. “더 이상의 행사는 없나요?” 미안하지만 없다. 취업 준비를 하느라, 학업에 열중하느라 우린 어느 순간부터 이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그만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정작 기획자들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려고 스피드 데이팅을 개최했나. 자괴감이 들었다. 혹시나 올해 내가 애인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열어보겠다. 그러니까 부디 나에게 소개팅을…. 친구들아 보고 있니?
정성은 프리랜서 V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