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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눈 내리는 벌판에서

입력 | 2017-01-27 03:00:00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도종환(1954∼ )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 그루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다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터져오르는 이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 있어 달려가고 싶다
 
 이제 설날이다. 많은 이들이 버스와 기차, 자동차에 몸을 싣고 떠난다.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바쁜가. 바빠서 한숨 폭 내쉬는 순간 이 시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다면 좋겠다. 오늘 나는 바빠야 옳았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피곤한가. 짐을 챙기고 아이들을 챙기고 티켓과 여정을 챙겨야 한다. 피곤해서 짜증이 날 때에 이 시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다면 좋겠다. 잠시나마 피곤함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만나러 가는 길을 상상하고 있다. 상상 속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길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발목이 푹푹 빠진다. 쉴 곳도 마땅치 않다. 동행하는 이도 없어 보인다. 걸어야 하는 길은 춥고 외롭다. 그렇지만 이 고난과 외로움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끝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기꺼이 눈길을 나설 수 있다.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이 사람은 눈이 내리는 벌판에 서 있고 싶지만, 사실은 벌판 같은 도시에 머물러 있는 처지다. 당장이라도 그리운 먼 그대에게 가고 싶지만,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시를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에는 유독 ‘가고 싶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 가니까 더욱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특히 중간에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이라는 구절이 유독 와 닿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체온과 목소리를 느끼고 싶은데 가진 것은 오직 나 하나의 체온과 몸이라니, 주위의 외로운 온도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가자. 피곤해도 짜증나도 담아 두고 가자. 시의 처지와는 달리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가는 길이다. 따뜻한 집의 그리운 이를 향해 달려가는 길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