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술자리에서 "한턱 내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A(30)는 발뺌하기 시작했다. A에게 술값 책임을 떠넘긴 건 '가장 먼저 취업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다. 하지만 A는 "'탕진잼(소소하게 낭비하는 재미)'에 빠져 통장 잔고가 바닥났다"고 하소연했다.
사연은 이랬다.
집에는 잘 안 쓰는 펜과 스티커, 생활용품이 잔뜩 쌓여갔다. 여기에 A는 전자제품을 비롯해 한달에 한번 꼴로 고가물품을 구입했다. 그 결과 매달 300만 원 가량 카드 명세표가 날아들면서 그의 월급통장은 바닥이 나 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A를 타박했다. 그러나 A도 나름 이유를 설명했다.
"매일 9시 넘어 퇴근하는데 우짜라고(어떻하라고). 스트레스 풀 때도 없는데 이거(탕진잼)라도 있어야지."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술잔을 들었다. 친구 한 명이 술잔을 들고는 이렇게 외쳤다. "헬조선! 행복은 다음 생에서!"
쇼핑중독증도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홧김에 버스대신 택시를 탔다" "매일 밤늦게까지 꼰대 상사랑 있다보니 이제는 집에 가서 혼술(혼자 술 마시기) 안 하고는 잠도 안 온다. 지금 맥주사러 가는 중"이라는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스트레스를 소비로 푼다는 푸념들이 쏟아진다.
이처럼 자조섞인 신조어가 확산되는 것은 팍팍한 국내 근무환경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AI(인공지능), 빅데이터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직장은 근무자의 창의력보단 '장시간 근무'가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지난해 일본의 노동정책연구기관이 작성한 '데이터북 국제노동비교 2016'에 따르면 한국은 2014년 기준 장시간(49시간 이상) 노동 취업자 비율이 32.4%로 가장 높다. 일본은 21.3%, 미국은 16.6%이다.
술자리는 A의 하소연이 끝난 뒤부터 각자 살벌한 회사생활을 토로하는 성토장이 됐다. 그렇게 얼큰하게 취한 뒤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식세대의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하여!"
아직 미혼인 친구들은 현재의 행복은 생각조차 못한 채 자식이라도 좋은 세상을 만나기를 기원한 것이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