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느낌을 사랑했던’ 청년은 9월이 되자 혼자 그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엘리는 상점에 가서 여행 가방을 하나 고른다.
“신비를 믿지 않는다면 글쓰기란 별 가치가 없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한 윌리엄 트레버 장편소설 ‘여름의 끝’ 이야기다. 사려 깊고 관대함으로 가득 찬 그 책을 덮고 난 후에도 한 번도 자기만의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듯한 엘리가 신중하게 녹색 트렁크를 고르던 장면, 창고에 숨기던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그 트렁크로 한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유럽에 간 것은 꼭 17년 전이었다. 원로 시인, 독문학자들, 평론가와 뮌헨행 기차를 기다릴 때였다. 두 개나 되는 트렁크를 옮기느라 낑낑거리는 나를 지켜본 여성 독문학자가 충고했다. “짐은 자기 힘으로 들 수 있을 만큼만 챙겨 갖고 다니는 거예요.” 그 후로도 가볍고 간단하게 다니지는 못하지만 너무 크지 않은 가방 두 개에 짐을 나눠서 어디든 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챙기는 요령은 갖게 되었다. 1년에 한두 번씩은 붉은 패브릭 소재의 트렁크에 무언가를 담고 비우고 채우고 덜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집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과 뗄 수 없는 행위일지 모른다.
지난여름, 도쿄 ‘세계 가방 박물관’에서 오후를 보낸 적이 있다. 진귀한 가방들을 둘러보다가 여행용 트렁크들 전시대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트렁크를 보기만 해도, 트렁크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다 돌아오게 되든 트렁크에 담는 것들 중에는 희망이 가장 클지도 모를 테니까.
엘리는 돌로 가득 채운 트렁크를 강으로 밀어 넣는다. ‘가방이 탁한 물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본 후 늘 그렇듯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