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이다.” 1일 오전 일명 ‘반기문 테마주’에 목돈을 건 주식투자자들은 눈물 흘렸습니다. 이날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대선불출마를 선언했죠. 2일 △지엔코 △성문전자 △씨씨에스 등 관련 테마주는 급락을 면치 못했습니다. 거래제한폭까지 떨어진 종목도 많았죠. 사실 반 전 총장 관련주는 1년 간 등락을 거듭했습니다. 반 전 총장의 정치적 우여곡절이 반영된 것이죠. 외교영웅과 유력한 대권주자, 대선열차 하차로 이어지는 굴곡진 1년이었습니다.
❙ 빨랐던 대망론, 늦었던 출마선언
반 전 총장이 대선출마를 시사한 건 지난해 5월25일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관훈클럽 포럼에 참석한 반 전 총장은 당시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71)과 버니 샌더스(77)를 사례로 들며 “체력에 자신있다”고 말했죠.
한국에 필요한 '지도자상'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반 전 총장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누군가 대통합을 선언하고 솔선수범하면서 국가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답했죠.
이밖에도 반 전 총장은 직접적인 출마 의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대권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5일 오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2016.5.25 제주공항 사진공동취재단
분위기가 이런데도 반 전 총장은 결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언론과 정치권의 계속된 물음에도 반 전 총장은 대권출마 여부를 밝히지 않았죠.
지난해 12월 21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특파원단을 만난 반 전 총장은 드디어 '사실상의 대권출마 선언'을 합니다. 2014년 11월 '반기문 대망론'이 불거진 뒤 2년여 만이었죠.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와 촛불 시위 등의 영향으로 새누리당이 분당한 날이었죠.
❙ 잔혹한 반기문의 1월
지난달 25일 대권 행보를 이어가던 반 전 총장은 국회의원들과의 비공개 조찬 간담회에서 한숨을 내쉬며 한 말입니다. 귀국 직후 정치교체와 국민통합 행보로 '반기문 바람'이 불 것을 예상했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다는 의미였죠.
지난달 12일 금의환향한 반 전 총장은 곧바로 민생 투어에 들어갔습니다. 소통의 리더십을 보이며 대선 레이스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한 것이죠. 하지만 언론과 디지털 비평을 통해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연일 곤두박질쳤습니다.
특히 유엔 사무총장 재임 시절 한일 위안부 협상 결과에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한 발언이 재조명돼 언론의 집중 취재를 받았죠. 이 과정에서 반 전 총장은 특정매체 기자들을 지칭해 "나쁜 놈들"이라 발언해 논란이 됐습니다. 또한 "보수인가 진보인가" "입당하나 안 하나" 등의 정치적인 결정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반 전 총장은 줄곧 ‘반반(半半)’이란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죠.
'만 원권 지폐 두 장 동시투입' '턱받이 논란' '마스크 쓰지 않은 방역' '사람 사는 '사회'(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쓰던 문구인 '사람 사는 세상'을 잘못 표기) 등의 논란도 온라인에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반 전 총장측은 "악의적인 편집이다"라고 맞섰지만 끝내 지지율 하락을 막진 못했죠.
1월 23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의 대선 주자 지지율은19.8%(전주 대비 2.4% 포인트 하락)로 29.1%로 나타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보다 10% 포인트 뒤졌습니다. 지난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1위였던 반 전 총장을 바라보는 민심이 급변한 것입니다.
반 전 총장의 행보. 동아일보DB
결국 반 전 총장은 귀국 20일 만(2월1일)에 대선행 열차에서 하차합니다. 반 전 총장은 대선불출마 이유를 "가짜 뉴스에 상처 받고 편협한 정치에 실망했다"라고 설명했죠.
반 전 총장측이 꼽은 대표적인 가짜 뉴스는 '퇴주잔 논란'이었습니다. 지난달 14일 충북 음성 부친 묘소 성묘 중 퇴주잔을 받아 마시는 것처럼 짜깁기한 동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습니다. 지난달 18일에는 조선대 강연에서 "광주는 훌륭하신 충렬공이 탄생한 곳"이라는 반 전 총장의 발언을 일부 언론이 '충무공'으로 잘못 알아듣고 오보를 내는 해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와같은 가짜 뉴스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반기문 기대감'이 급락했다는 것이 반 전 총장측의 주장입니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이 귀국 이후 '보여주기식 행보'에 매몰돼 민심을 잃은 것이 문제였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또한 정치권의 냉대 속에 개헌 세력을 결집해 반문(반문재인) 진영에 '빅텐트'를 치려했던 초기 구상이 무너진 것과 "(이대로라면)보수의 소모품이 될 것 같다"는 회의감이 반 전 총장이 대선행 하차를 마음먹은 진짜 이유라는 의견도 나오죠.
❙ 반기문이 남긴 말
중도 하차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국회에서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동아일보 DB
반 전 총장의 '중도하차 발표'는 최측근 참모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깜짝 발표'였습니다. 대선불출마 발표가 있던 당일 오전까지만해도 참모진은 '바른정당 입당'과 '독자세력 구축'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하죠. 반 전 총장은 이날 새벽, 부인인 유순택 여사와 심각하게 논의한 뒤 발표문을 직접 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잔혹한 1월을 보내며 반 전 총장이 큰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외교영웅'에서 '기름장어'와 '반반' 등 회화화된 반기문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하차 발표 다음 날, 캠프 관계자들과 해단식을 겸한 오찬 자리에서 반 전 총장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이 말 속엔 외교관 출신으로 처음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맛 본 아쉬움과 쓰라림이 담겨있습니다.
"국가통합할 지도자 나와야" (동아일보 2016.5.26)
반기문 26%-문재인 16%-안철수 10% (동아일보 2016.6.11)
새누리 쪼개진 날, 潘 대권 출사표 (동아일보 2016.12.22)
[사설]귀국 1주일 반기문, 언제까지 半半인가 (동아일보 2017.1.19)
야권서 흔들고 지지율은 안 오르고 (동아일보 2017.1.20)
반도 못뛰고 (동아일보 2017.2.2)
새벽에 부인과 논의후 선언문 작성 (동아일보 2017.2.2)
구성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