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이든 모험이든 새로운 세계 여는 시도 무모한 도전 같아도 넓은 세상 알 수 있고 진화 이끄는 길 결국 필요한 건 ‘용기’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
1840년 아편전쟁을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완전 승리라고 의미 부여를 할 때, 혹시 이것은 ‘탐험’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빚은 역사적 귀결이 아닌가 하고 다소 과해 보일 수 있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서양에는 직업 탐험가가 존재한 역사가 있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탐험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다. 탐험이 인간 활동의 뚜렷한 한 유형이 된 곳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탐험에 제일 가까운 말로는 모험이 있다. 탐험은 위험한 곳을 찾아가는 매우 무모한 행동이고,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탐험이든 모험이든 기본적으로는 위험에 접촉하는 거칠고 과감한 기질이 관련된다. 위험한 것들은 다 이상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익숙지 않고 아직은 이름 붙지 않은 모호한 것들은 다 불손하다. 반대로 익숙한 것들은 사람을 편하게 하고 안전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래서 안전과 익숙함은 서로 가깝다. 불안은 생경함이나 모호함과 가깝다. 어쩔 수 없이 탐험가들은 익숙함을 오히려 답답해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익숙함과 결별하는 용기가 없다면 모험은 불가능하다. 모험은 불안을 감당하는 용기를 발휘해서 생경한 세계에 도전하고,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든다. 영토를 확장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험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행위가 된다.
‘안다’고 하는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보통 어떤 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데, 지식의 확장과 생산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그 행위’까지를 포함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자기 운동력도 없이 확장의 동력을 잃은 지식이라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모르는 곳은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불안의 처소이자 위험한 곳이다. 그 불안과 위험을 감당한 채 ‘에라, 모르겠다!’고 한 발을 덜컥 내딛는 무모함으로만 가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더 나은 곳이자 새로운 곳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된다. 지식이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이나 생활이나 모두 진화하고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일이 벌어지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탐험가적 정신이나 모험심이 있어야 한다. 결국은 용기다.
용기가 없으면 더 나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모험심이 사라져 현상을 지키는 기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방송은 시청률에 빠져 생기를 잃고, 대학은 취업률에 빠져 길을 잃는다. 고등학교는 진학률에 빠져 청춘들을 고사시킨다. 정치도 지지율만 쳐다보면서 정권 획득이라는 기능에 빠져 새로운 세계를 열지 못한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요원해진다. 더 나은 곳에서 새롭게 살고 싶으면 더 모험적이고 무모하고 과감하고 거칠어야 한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건명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