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지시 2년반 동안 기록 작년 국감에 삼성 출석 않도록 하고 줄기세포 규제 완화… 차병원 수혜 대기업들 ‘청탁’도 적혀있을지 주목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장지갑 크기, 40∼50쪽짜리 수첩 39권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61·구속 기소) 국정 농단 사건의 새 ‘판도라의 상자’로 주목받고 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지난달 26일 확보한 쇼핑백 한 개 분량의 이 수첩들은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58·구속 기소)이 작성한 것들이다.
특검이 새로 확보한 수첩들은 안 전 수석이 대통령경제수석에 임명된 2014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 구속되기 직전까지 쓴 것이다. 안 전 수석의 측근은 이 수첩들을 설 연휴 직전 특검에 임의제출했다. 안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물론이고 박 대통령이 참석한 회의나 행사에서 한 발언 중 자신이 기억하거나 이행해야 할 내용을 수첩에 빠짐없이 적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지난해 확보해 특검에 넘긴 기존 수첩 17권은 2015년 8월부터 같은 해 말까지 작성된 것으로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면 이번에 확보된 수첩에는 박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훨씬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안 전 수석은 최 씨 단골 성형외과 원장 김영재 씨의 부인 박채윤 씨에게서 명품 백 등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자 특검에 ‘백기 투항’의 뜻으로 이 수첩들을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첩에는 ‘줄기세포의 안전성이 입증됐으니 임상실험 장벽을 낮추고 정책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박 대통령 지시도 상세히 적혀 있다. 박 대통령에게 무료 줄기세포 치료와 주사제 대리 처방을 해준 의혹을 받고 있는 차움이 소속된 차병원은 이런 정책의 대표적 수혜자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차병원 측을 도우려고 줄기세포 규제를 완화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최 씨가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 인선 과정에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는 데도 수첩 속 ‘삼성 아그레망’이란 메모가 결정적이었다. 외교 사절을 보낼 때 미리 상대국 동의를 얻는 절차를 뜻하는 ‘아그레망’이라는 단어를 적은 이유에 대해 안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이 삼성 임원 출신을 미얀마 대사로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상화 KEB하나은행 본부장이 유 대사를 최 씨에게 소개한 사실도 수첩에 적힌 이 씨의 이름 세 글자가 발단이 됐다.
특검 주변에서는 “수첩 내용이 매우 상세해 국정 농단 사건 관련자들의 살생부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때문에 SK와 롯데, CJ 등 수사 대상에 오른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을 지원한 반대급부로 청탁을 한 사실이 수첩에 적혀 있을까 봐 긴장하고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