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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서영훈 前 대한적십자사 총재

입력 | 2017-02-06 03:00:00

민족화합 헌신한 시민사회운동 큰 어른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 개인적으론 친아버지처럼 저를 많이 지도해주신 분이었다.”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일원로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사진)의 빈소를 찾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서 전 총재의 부인 어귀선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반 전 총장이 1962년 미국 적십자사 초청 외국학생방미프로그램(VISTA) 대표로 선발돼 존 F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을 만나고 외교관의 꿈을 키우게 된 데도 고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연락을 드렸지만 어 여사가 ‘상당히 위중하셔서 지금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우리 시대의 선각자였고 국민들한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며 고인을 애도했고,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는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샘물 같은 정신적 지주였다”고 평가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천정배 나경원 의원, 김한길 전 의원,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등 각계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시민사회운동의 원로인 서 전 총재가 4일 오전 9시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3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홀로 월남했다. 이후 정의사회구현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1953년 3월 청소년국장으로 한적에 몸을 담은 이후 청소년적십자(RCY)를 만들기도 한 고인은 한적을 고향처럼 여기고 활동했다. 한적 사무총장 시절인 1980년 민주화운동이 벌어지자 직접 앰뷸런스를 타고 포위망을 헤쳐 광주 시내로 혈액을 날랐던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고인을 오랫동안 보좌한 이병웅 한적 중앙위원(76)은 “광주의 실상을 본 뒤 서울로 돌아와 ‘다친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국에 산소통을 요구하던 서 전 총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남북회담의 시초인 1972년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평생 많은 남북회담에 대표로 나서는 등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쏟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표를 맡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3년 고인은 흥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본부 강당을 민주화운동 단체의 집회와 기자회견장으로 제공했다.

 서 전 총재는 청렴과 청빈을 평생 신조로 삼고 살아왔다. 민주당 대표 시절 그의 지갑을 열어보니 2000원뿐이었다는 이야기, 한적 사무총장 시절 집에 전화가 없어 그를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일화 등을 남겼다. 민주당 대표 시절 ‘3만 원 이상 점심 안 먹기 운동’을 펼치며 정치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유족으로는 어 여사와 아들 홍석 유석 경석 씨, 딸 희경 씨 등 3남 1녀가 있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02-3410-6903
 
주성하 zsh75@donga.com·최지연·조건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