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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충돌론’의 함정에 빠진 트럼프 백악관[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7-02-08 16:58:00



2001년 10월 8일.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바로 그날 새뮤얼 헌팅턴 당시 하버드대 석좌 교수의 ‘문명의 충돌’ 한국어판(김영사)을 사들었습니다. 기세 등등하던 미국식 세계화가 2001년 9·11테러를 당하고 주춤하던 시절,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의 공격과 뒤이은 미국의 대 중동 전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딱 알맞은 책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영원히 확장되는 ‘역사의 종말’은커녕 향후 세상은 다양한 문명들이 서로 갈등하는 복잡다기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자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서구 문명 대 이슬람 문명의 대결이었지요.

16년이 흐른 지금 ‘문명 충돌론’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헌팅턴 교수는 2008년 12월 세상을 떠났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다시 그를 불러냈습니다.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의 에마 애쉬포드 선임연구원은 7일 ‘내셔널 인터레스트’ 기고를 통해 “트럼프 팀은 문명충돌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애쉬포트 연구원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마이클 플린 국가안보보좌관, 캐슬린 맥팔랜드 NSC 부보좌관 등은 미국이 이슬람과의 ‘문명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인식을 한다는 점에서 헌팅턴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공유한다는 점도 같습니다.

이들의 인식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무슬림 7개국의 입국을 금지한 반 이민 행정명령으로 현실화 됐습니다. 7개국의 첫 번째로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인 이란이 명시되고 이에 반발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이란에 대해 미국이 추가 제재를 하면서 미-이란 간 샅바 싸움이 시작된 것도 마찬가지의 흐름입니다. 특히 플린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란을 ‘반 서방 글로벌 네트워크의 린치핀(Linchpin·핵심 고리)’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반 이민 행정명령 사태 이후 워싱턴 정가에서도 트럼프와 측근들의 반 이슬람 정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애쉬포트 연구원은 헌팅턴 교수의 ‘문명충돌론’의 한계와 단점이 그대로 트럼프 행정부의 그것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서구 문명이 이슬람 등 일곱, 여덟 개의 다른 문명과 투쟁하는 것이 향후 세계 역사가 될 것이라는 설명은 매우 간명하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명 간에도 훌륭한 협력과 공동 번영을 해왔고 반대로 같은 문명 간에도 충돌이 일어나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문명충돌론’이 자기충족적 예언(self fulfilling prophecy)이 될 가능성입니다. 서방이 이슬람 문명을 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문명간 분쟁이 일어납니다. 트럼프의 반 이슬람 행보에 대해 이슬람 국가(IS)와 알카에다 등 극단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환호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핑계삼아 분노한 이슬람 전사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려 때문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그 전임자인 부시 대통령도 알카에다와 IS에 대한 전쟁이 ‘서방 대 무슬림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애쉬포드 연구원은 지적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벌이지고 있는 미국과 이슬람의 갈등 상황은 저 세상의 헌팅턴 교수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