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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D/ Opinion] 악당들에게는 돈을 보태주지 말아야

입력 | 2017-02-10 09:35:00

김용섭의 TREND INSIGHT






최근 미국에선 트럼프 지지자들의 스타벅스 불매운동이 역풍을 맞았다. 스타벅스의 CEO 하워드 슐츠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슬림 7개 국가 국민의 자유 입국 금지 조치가 발표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오히려 향후 5년간 스타벅스의 전 세계 75개국 매장에서 1만 명의 난민을 고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스타벅스 불매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의 지지는커녕 조롱만 받았다.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의 스타벅스 불매운동을 비꼬는 게시물이 온라인에 급속도로 번지며, 스타벅스 커피를 잘 보이게 사진을 찍어 SNS에 퍼뜨리는 열풍을 낳았다. 스타벅스 불매운동이 스타벅스 구매운동에 묻힌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스타벅스 불매운동은 소비자의 권리와 상관없이 트럼프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에 대한 대응 차원인 집단적 무력행동에 불과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진 악의적 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일반 소비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한국에선 반대의 상황이 있었다. 촛불 집회 비하와 가짜 홍삼 농축액 사용으로 논란이 된 천호식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박사모 사이트에서 천호식품을 응원하며 구매운동을 벌이는 게시물이 나돈 것이다. 사실 이런 건 잘잘못을 따지는 논리적 접근이 아닌 맹목적 집단행동일 뿐이라서 요즘 시대엔 잘 먹혀들 리 없다. 명분이 없는 감정적 구매운동은 결코 확산될 리 없기 때문이다. 막상 그들도 말로만 구매하자고 하고선 실제론 절대 안 살 것이다.
    
요즘 멕시코에서는 미국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뜨겁게 번진다. 트럼프 정부의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추진에 따른 반미감정이 격해진 결과다. 그 타격을 미국의 기업들이 보고 있다. 사실 불매운동의 당사자가 된 미국 기업으로선 억울할 거다. 하지만 어쩌랴.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중 하나가 소비의 권리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미국 기업이 타격을 받으면 이들 기업의 목소리가 미국 정부와 의회에 들어가고, 이것이 결국 정책의 방향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는 가치관과 별개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값싸게 파는 기업이라도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는 기업이 파는 물건을 사는 건 소비자가 가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비자, 말 그대로 물건을 사서 소비하는 사람인데, 사실 우린 소비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 소비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한 요소일 뿐이다. 우리의 가치관이자 삶의 방식의 일환으로 특정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고, 우리가 낸 돈이 그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악당들에게 돈을 보태주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령 일본에 가면 위안부와 난징대학살을 부인하는 극우 성향의 서적을 객실마다 비치한 APA 호텔은 불매해야 한다.  
   
불매, 말 그대로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얘기다. 과거엔 불매운동은 소비자 단체를 비롯한 특정 집단이 기업을 옥죄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젠 소비자의 자발적 판단에 따른 비조직적 불매운동이 주류다. 소비자 개개인이 불매의 명분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지, 휩쓸리듯 따라가는 게 아니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요즘은 SNS를 통해 불매 의사가 퍼뜨려지며 공감과 동조가 이어지는 것인데, 이건 소비자가 가진 정당한 권리 행사기도 하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요즘 소비자의 수준은 꽤 높아졌다. 이제 소비자는 물건 자체의 품질이나 가격 대비 성능만 따지는 게 아니다. 갑질을 하는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인지, 노동과 환경, 복지 등에서 얼마나 좋은 기업인지까지도 따진다. 과거엔 물건 자체의 하자가 불매운동의 핵심 이유였다면 이제는 그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기업이 가진 기업정신이자 오너, 경영진의 인성까지도 중요하게 고려한다. 기업은 소비자의 소비 때문에 돈을 번다. 즉 소비라는 행위는 기업을 살리고, 또 반대로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이 무기를 점점 중요하게 여기는 게 요즘 사람들이다.
     
네이버에서 불매운동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이랜드, 티몬, 옥시, 농심, 피죤, 삼성전자 등이 연관 검색어에 나온다. 이랜드 외식 계열사에서 아르바이트생 4만4000여 명에게 임금 84억여 원을 미지급한 것이 드러난 이후, 이랜드는 외식뿐 아니라 패션까지도 불매의 타깃이 되었다. 사과문을 냈는데도 진정될 기미가 없자 사죄문이라며 더 강력한 사과를 내세웠는데도 불매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신뢰는 쌓기 어렵고 쌓는 데 오래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위선적이게도 이랜드의 경영이념은 나눔, 바름 등이다.

여전히 많은 소비자가 남양우유를 불매한다. 남양의 갑질 사태는 2013년의 일이다. 몇 달이면 소비자가 잊을 거라는 건 오산이다. 요즘 소비자는 기억력도 좋고, 잊을만하면 또 SNS에서 상기시켜준다. 회장의 갑질로 불매운동을 맞아 점유율 급락을 경험한 피죤, 사실 피죤의 갑질 사건은 2011년 얘기다. 그런데 2017년인 지금까지도 불매운동의 대상으로 손꼽힌다.

이제 한번 찍히면 꽤 오래갈 수 있다. 한번 무너진 정권의 신뢰처럼 기업의 신뢰도 무너진 후 회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소비자는 기업이 한 일이 실수인지, 원래 그런 기업인지 금세 알아챈다. 이런 게 소비자의 진화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