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서울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소속
제사 때도 돼지고기 삶은 물을 버리는 것이 아까웠는데 일본에서는 돈코쓰 라면이라고 해서 돼지뼈를 끓여 수프를 낸다. 돼지고기 삶은 국물이 비슷해 보이고 맛있어 보였기 때문에 안 버리고 뭔가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눈치가 보여 아직 실행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는 감자나 계란을 삶을 때도 물을 많이 넣는 게 맛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부러 물을 적게 넣는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수증기를 이용해서 삶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 설명을 듣고 가스도 물도 절약되는 경제적인 발상이라고 감탄한 기억이 난다.
나에게 1년 내내 생각나는 음식은 대보름 음식이다. 거의 그날밖에 안 먹는 마른 호박나물이나 가지나물, 된장으로 볶은 시래기, 두부 쇠고기국, 오이냉국, 오곡밥 등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음력 1월 15일 전날 만들고, 다음 날은 하루 종일 그 밥과 반찬을 먹고 칼질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냥 꺼내서 먹기만 하면 되니까 마음의 부담이 없다. 주부들의 휴일 같은 날이다.
대보름날 아침, 이름을 부르고 응답을 하면 “내 더위”라고 말하고 1년 동안의 더위를 팔아넘기는 풍속도 재미있었다.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막내 시동생이 항상 내 더위를 사갔다. 그날 술도 마셔야 귀가 잘 들리게 된다고 하는데, 술을 못하는 나는 항상 안 마셨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어머니 말이 잘 안 들리는가 보다.
일본에서는 대보름 비슷한 시기인 양력 2월 3일에 집집마다 세쓰분이라는 행사를 한다. 얼굴에 빨간 도깨비 가면을 쓰고 현관에서 들어오려고 할 때 대두 콩을 도깨비를 향해 한 주머니 뿌린다. 그때 “오니와 소토(악귀, 액운은 밖으로 나가라)”, 반대로 현관에서 집 안을 향해 “후크와 우치(복은 집 안으로 들어와라)”라고 외친다.
연중 행사나 축제의 유래를 보면, 신에게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는 소박하고 절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첨단 농업기술이나 의약품 등이 없었던 시대에는 그저 신에게 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중 행사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오는 것도 그런 소박하고 순수한 생각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이 현대 우리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는 계란말이가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많다. 계란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소금과 함께 설탕도 조금 넣는다. 일본 학교에서는 일요일에 운동회를 하는데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만들어 온 도시락을 먹는다. 운동회 때나 소풍 때 먹었던 추억이 있어서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요리를 잘하셔서 맛을 보며 배우기는 하는데 아무리 해도 한국인이 내는 진한 맛을 못 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깊고 진한 세월을 살아온 한민족이 내는 깊은 맛을, 담백한 맛에 익숙한 일본인들이 따라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인생의 맛을 조금 알게 됐다는 증거일까.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서울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