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피살소식에 탈북단체 촉각
15일 오후 서울의 한 탈북단체 사무실 앞. 굳게 닫힌 문에는 잠금장치 2개가 달려 있었다. 각각 비밀번호와 지문을 입력하는 방식이다. 옆에 있는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이들은 신분을 물은 뒤 1분 가까이 지나서야 문을 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중국 정부가 잘 보호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몇 년을 조심하다가도 잠깐만 방심하면 이렇게 죽어 버리는구나 싶더군요.”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바라보며 A 씨는 허탈한 듯 말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북한을 탈출했다. 전날 언론을 통해 김정남 피살 소식을 접했다는 A 씨는 대화 내내 수시로 신문을 내려다봤다. 가끔 김정남 사진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이날 오전 담당 형사와 경호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 탈북자들 충격과 공포
소식을 전해들은 국내 탈북자들과 탈북단체 측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김정남이 오래전부터 수차례 살해 위협을 받은 것 때문이다. 현인애 남북하나재단 이사(60·여)는 “김정은 입장에서는 중국의 보호를 받는 김정남이 항상 두려웠을 것”이라며 “북한의 김정남 암살 시도가 계속됐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언젠가 일어날 일’로 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탈북자 B 씨는 “숙청된 장성택이 김정남에게 해외 도피 자금을 제공했다고 들었다”며 “탈북자 사이에서는 장성택 처형 후 ‘김정남은 필연적으로 죽을 목숨’이라는 말이 오갔다”고 설명했다.
탈북자들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탈북자들이 사용하는 모바일 메신저에는 ‘김정은이 무섭다’는 글이 끊이지 않았다. 김정아 통일맘연합 대표는 “수십 명의 탈북자가 참여하는 대화방에서 ‘친형이나 다를 바 없는 김정남을 죽인 걸 보면 김정은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김정남이 공공장소인 공항에서 피살되면서 “한국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분위기다.
그동안 공개적으로 활동하며 북한을 비판해온 탈북자들의 활동이 당분간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방송 등에서 김정은 체제를 수차례 비판했던 탈북자 C 씨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공항에서 대담하게 벌어진 암살에 크게 놀랐다”며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물건으로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다니 무서울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인권단체 관계자인 D 씨도 “그간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탈북자들이 다른 탈북자와의 만남도 꺼리게 될 것”이라며 “북한인권 관련 활동이 위축될까 걱정”이라고 진단했다.
경찰은 “주요 탈북인사 등에 신변보호팀을 추가로 배치했다”고 15일 밝혔다. 특히 경찰 2명이 24시간 밀착 경호하는 ‘가급’ 인사의 경호를 강화했다. ‘가’ ‘나’ 등으로 분류되는 인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가급’ 인사는 현재 국내에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그리고 대북전단 살포 등으로 2011년 독침 암살 대상으로 지목됐던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 담당하는 탈북 인사에게 해외 출국 자제를 요청하거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상담에 나서기도 했다.
일반 시민들도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이 북-중 관계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주부 서계연 씨(49)는 “미사일을 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정은이 형제를 죽였다고 하니 나라 안팎이 불안해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권기범 kaki@donga.com·김배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