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자아, 超자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
구조이론? 어렵지 않습니다.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말이 프로이트의 언어였던 독일어(모국 오스트리아의 표준어)로는 그저 ‘그것, 나, 나의 위’인 것을 알고 가면 더 쉽습니다. 이드는 그야말로 무의식에 살면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서 ‘그것’으로 불렀습니다. 온갖 욕구와 소망의 덩어리를 말하는데 대표 선수로는 성욕과 공격성이 있습니다. 초자아(나의 위)는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인데 한쪽에는 도덕과 양심을 갖추고 있고 다른 쪽에는 자아 이상을 포함합니다. 더 풀어내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되고 싶은 것’의 집합입니다. 자아(나)는 달콤한 것 달라고 보채는 이드와 단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경고하는 초자아, 그리고 주머니 사정(현실 여건)의 셋 사이에 끼여 달래면서 해법을 고민하는 역할인데, 그러니 타협과 중재가 전문입니다. 초자아와 자아는 일부는 의식에서, 나머지는 무의식에서 활동합니다.
이드가 과하게 설치면 어떻게 될까요. 욕망의 화신이 됩니다. 자제되지 않는 성욕은 성매매, 성희롱, 성폭행으로 이어질 겁니다. 브레이크 없는 공격성은 보복운전, 경찰관 폭행으로 연결되고 결국 법의 처벌을 받을 겁니다. 이드가 너무 위축되어 있다면? 남들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칭송하겠지만 삶이 무미건조하겠지요.
자아가 힘을 키우지 못한 경우는? 너무 약한 자아로는 세상의 풍파를 견뎌낼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쉽게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끌려가서 수년간 노예 아닌 노예로, 월급도 못 받으며 살아 온 사람의 경우입니다. 끌려가지는 않아도 스스로 사로잡힌, 신경증(노이로제) 환자가 됩니다. 더 심하게 무너지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자아의 힘이 충분해야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욕망의 압력과 이를 견제하고 처벌하려는 초자아의 아우성과 현실의 여건 사이에서 견디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해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아는 ‘갈등 관리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는 갈등 관리에 방어기제라고 하는 ‘미사일’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아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유치한 것도, 성숙한 것도 있습니다. 유치한 것 중 하나는 눈을 감는 겁니다. ‘부정’이라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덮는 겁니다.
‘투사’도 있습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하며 안도하는 겁니다. ‘억압’이나 ‘억제’는 “기억이 안 난다”입니다. 억압은 무의식의 산물이라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고, 억제는 의식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아주 성숙한 기제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서 남을 돕는 ‘애타적 행위’가 있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비교적 성숙한 행위로는 ‘승화’가 있습니다. 칼을 휘둘러 남을 해치고 싶은 공격성을 돌려서 환자를 돕는 외과의사가 된다면 승화시킨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서 어른이 되어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성장 환경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배고프다고 보채면 늘 야단맞는 환경이라면 이드는 위축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너무 받아주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중식당에서 도대체 남들도 같이 있는 자리인지 자기네 집 거실인지를 구별 못 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난 걸 봅니다. 말리지도 않지만 기껏 말리는 부모의 음성이 더 시끄럽습니다. 초자아가 발동해서 옆에서 아이들을 저지하다가는 부모의 이드와 부딪쳐서 큰 싸움이 납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너무 야단쳐서 키우면 초자아가 경직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 배짱과 용기도 있어야 하는데 소심한 사람으로 자랍니다.
개인의 정신건강은 이드, 자아, 초자아의 균형에 달려 있습니다. 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한쪽은 이드로 행동하고 다른 쪽은 초자아로 공격하면서, 자아는 실종된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어 마음이 답답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