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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기자의 스포츠 한 장면]자이언트 킬링, 그라운드 밖에서도…

입력 | 2017-02-20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이종석 기자

언더도그(Underdog). 승부의 세계에서 이길 확률이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는 선수나 팀을 이렇게 부른다. 반대의 경우는 톱도그(Topdog)다. 그래서 당연히 질 줄 알았던 약자가 강자를 꺾고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면 종종 ‘언더도그의 반란’이라고 한다.

‘자이언트 킬링(Giant Killing).’ 조금 살벌해 보이는 표현이긴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언론이 ‘언더도그의 반란’과 비슷한 뜻으로 가끔 쓰는 말이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면 되지 싶다. ‘업셋(Upset)’이란 표현도 언더도그의 반란과 유사한 의미로 드문드문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같은 의미로 ‘하극상(下剋上)’이라는 말을 쓴다.

이틀 전,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 16강전에서 자이언트 킬러가 등장했다. 내셔널리그(5부 리그) 팀 링컨시티가 프리미어리그(1부 리그) 팀 번리를 1-0으로 꺾은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링컨시티의 승리였다. 링컨시티의 승리가 어느 정도의 반란이었는지는 속한 리그를 보면 알 수 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는 24부 리그까지 있다. 24부는 한국으로 치면 조기축구회쯤 되는 지역 동호인 팀들이 참가하는 리그다. 프로는 4부 리그까지다. 링컨시티가 참가하는 5부 리그부터는 ‘논 리그(Non league)’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프로 리그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링컨시티의 승리는 프로가 아닌 팀이 프로 팀을, 그것도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는 프리미어리그 소속 프로 팀을 꺾은 ‘대반란’이다.

논 리그 팀이 FA컵 8강에 오른 건 103년 만이라고 한다. 1914년 퀸스파크레인저스 이후 링컨시티가 처음이다. 1884년 창단한 링컨시티는 133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 있는 팀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부 리그에 속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링컨시티 선수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생업이 따로 있다. 지난달 2부 리그 팀 입스위치타운과의 64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네이선 아널드는 이발사다.

약팀이 강팀을 잡는 언더도그의 반란. 승부의 세계 스포츠의 매력을 꼽으라면 빼놓지 않을 한 장면이다. 대표적인 자이언트 킬러를 꼽자면 2000년 프랑스 FA컵 대회 때 ‘라싱 위니옹 FC칼레’를 들 수 있다. 인구 약 8만 명인 프랑스 북부의 항만 도시 칼레를 연고로 한 이 팀은 당시 4부 리그 소속으로 상위 리그 팀들을 연달아 꺾고 결승전까지 올랐다. 슈퍼마켓 주인, 정원사, 항만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이 팀의 당시 결승 진출은 ‘칼레의 기적’으로 불렸다. 어제 잉글랜드 3부 리그 소속 밀월FC는 한 명이 퇴장을 당한 수적 열세 속에서도 1부 리그 팀 레스터시티를 누르고 8강에 올랐다. 레스터시티는 작년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한 톱도그다.

상위 리그 팀이 하위 리그 팀보다, 부자 구단이 가난한 구단보다 상대적으로 승률이 높은 건 맞다. 유럽 4대 리그로 통하는 잉글랜드와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의 1부 리그에서 1964년부터 2013년까지 50년간 우승을 차지한 팀은 리그별로 7∼12개밖에 안 된다. 그만큼 돈 많은 팀이 우승을 많이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톱도그가 늘 이기는 건 아니다. 돈을 많이 쏟아붓는 구단이 언제나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다. 삼성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삼성이 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스포츠다. 그게 또 매력이다.

“당연히 이길 것으로 기대했던 상대한테 패하면 그때만큼 스트레스 받는 일이 또 없다. 하지만 관중에게는 그런 게 재미다.” 2013년까지 27시즌 동안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사령탑을 맡아 리그 우승 13회, FA컵 우승을 5차례나 차지한 알렉스 퍼거슨이 한 말이다. 아무리 팬이라도 만날 이기는 팀 경기를 누가 재미있어 하겠나.

언더도그의 반란, 자이언트 킬링, 업셋, 하극상…. 약자의 예상 밖 승리를 뭐라고 부르든 스포츠의 세계가 아니고서는 요즘 이런 장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흙수저가 경쟁에서 금수저를 넘어서기는 점점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의 열세를 극복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정상까지 오르는 개똥밭의 인물도, 개천의 용도 보기가 힘들다.

“지금 우리 형편에선 축구가 로맨틱할 수는 없지만 각광받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특별하다.” 링컨시티 대니 카울리 감독의 얘기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링컨시티 같은 자이언트 킬러가 많이 나오기를….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