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VIP는 처음엔 군사·경호 음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군서울지구병원의 대통령 전용병실이 ‘VIP 병실’이었다.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을 기록한 문서가 외부로 새어 나갔을 때에 대비한 기초적인 암호였던 셈이다. 국방부나 청와대 밖에서도 이 표현을 널리 쓰기 시작한 건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라고 한다. 김영삼 정부 이전에 ‘각하’ 호칭은 공식적으로 없앴지만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결례인 것 같아 VIP라는 표현을 썼다는 게 한 고위 공무원의 설명이다.
공식 표현인 ‘대통령님’은 그 직위와 직무만을 지칭하지만 VIP라고 부를 땐 “그의 의중이 ‘매우 중요(Very Important)’하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게 된다. 전문가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며 타당성을 따져야 할 국가사업이 내리꽂기 식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의 수첩에 ‘VIP 지시사항’으로 빼곡히 적힌 미르·K스포츠재단 사업은 별다른 검증 없이 그대로 수행됐다. 관계자들은 검찰에 불려가 “VIP의 지시라는데 토를 달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VIP라는 표현에서는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각에도 대통령의 심기를 우선시하는 속내도 엿보인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대·통·령’이라는 3음절 대신 ‘브·이·아·이·피’라는 5음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양경찰청과의 통화 녹취록엔 청와대 관계자가 구조 지휘에 여념이 없는 상황실 직원에게 “VIP 메시지”니까 “그냥 적어”라고 말하며 하나 마나 한 지시를 전달하는 대목이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해경이 실종자 수를 정정해서 보고하자 “큰일 났네, 이거. VIP까지 보고 다 끝났는데. (중략) 아까 190명 구조라고 했을 땐 너무 좋아서 VIP께 바로 보고했거든”이라며 초조해한다.
더 걱정스러운 건 공무원끼리 대화를 나눌 때 대통령을 VIP라고 부르면서 생기는 ‘내부자’의 인식과 일반 국민과의 괴리감이다. 안팎의 언어가 다를 때 안팎의 사고 체계도 달라진다.
이제 그놈의 VIP 소리 좀 그만하자. 정부 내부 문건에서 VIP 표현을 없애겠다는 대선 공약을 보고 싶다. 공무원이 모셔야 하는 VIP는 ‘한 분(Person)’이 아니라 국민(People) 아닌가.
조건희 정책사회부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