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器皿)은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소설을 쓰는 한 남자가 일상에서 도망치듯 한 암자로 떠난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길로 산책을 다니다가 남자는 요와 이불 한 채씩만 있는 삭막한 방에 꽃을 꽂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꽃을 꽂아둘 기명 같은 게”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널려 있는 음료수 깡통들을 주워 입구를 도려낸 후 꽃병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지만 암자나 이웃집, 마을의 잡화점에서도 깡통따개는 구할 수가 없다. 소설은 안 쓰고, 그때부터 남자가 깡통따개 찾기 순례를 시작하는 이야기.
1970,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었던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1년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올 때 사오는 신기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게 된 빅토리녹스 칼이 있었다. 크기도 작고 납작한데 드라이버, 핀셋, 자, 가위, 칼, 오프너, 깡통따개까지 척척 겹쳐 있는 게 놀라워 보였다. 잘 알려진 대로 오프너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리스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다. 고정된 받침점과 힘이 작용하는 힘점, 그리고 힘이 작용되는 작용점. 이른바 ‘지렛대의 원리’다. 이 원리로 이용되는 오프너나 깡통따개, 손톱깎이, 가위 같은 사물들은 서랍 밖으로 꺼내 놓기는 어렵지만 필요할 때마다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해 낸다. 믿음직스럽고 충직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기명의 비슷한 말로 기물(器物)이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없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물, 깡통따개에 관해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