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경찰 “北외교관 연루”
“김정남 이렇게 공격당했다” 칼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왼쪽)이 22일(현지 시간) 쿠알라룸푸르 경찰청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여성 용의자들이 액체 형태의 독극물을 맨손에 묻혀 김정남의 얼굴에 문질렀다고 설명하며 손동작을 흉내내고 있다. 쿠알라룸푸르=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말레이시아 당국의 칼끝이 배후의 정점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향하고 있다. 22일 칼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암살은)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이뤄졌다”고 밝혔다. 현지 북한대사관은 물론이고 평양의 김정은 정권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평양에서 온 공작원과 현지 북한대사관의 외교관 등 8명이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동남아 여성 2명을 앞세운 청부 암살 작전이라는 얘기다. 국가 범죄로 볼 수 있는 만큼 말레이시아가 대사관 폐쇄 등 북한과의 단교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부 바카르 청장이 신원을 밝힌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 현광성(44),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은 범행 당일 쿠알라룸푸르 공항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지만 경찰이 19일 기자회견에서는 ‘신원 미상’이라며 사진만 공개한 인물들이다. 아부 바카르 청장은 두 사람이 “사건과 관련돼 있는 근거가 확실히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20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현광성은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평양으로 도주한 리재남(57) 등 공작조 4명이 현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대사관이 암살 사건에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현광성이 이번 암살 작전을 총감독하며 강철 주말레이시아 대사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주요 역할을 맡았다고 보도했다. 외교관 면책특권을 악용했다는 점에서 국제적 규탄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항공 직원인 김욱일은 김정남이 살해되기 2주일 전인 지난달 29일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13일 사건 직후 평양으로 달아난 공작조의 말레이시아 입국과 3개국을 거친 도주 항공편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 쿠알라룸푸르∼평양 고려항공 직통은 2011년 개통됐다가 2014년 대북 제재로 중단됐다. 김욱일은 직원을 위장한 공작원으로 보인다. 아부 바카르 청장은 공무여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를 “정부 관계자”라고 표현했다. 외교관 여권을 가진 현광성 이외에 나머지 용의자 6명도 공무여권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FNN)는 “경찰이 이날 쿠알라룸푸르 소재 고려항공 사무실을 전격 수색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며 “2012년부터 사무실을 임차했지만 16일 갑자기 직원이 사라졌다”는 건물 관리인의 말을 전했다.
아부 바카르 청장은 현광성, 김욱일과 ‘제임스’로 불리는 북한 국적 리지우(33)는 말레이시아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용의자 3명의 면담을 북한대사관에 요청한 사실도 공개했다. ‘북한이 배후가 아니다’라고 발뺌하는 강 대사에게 ‘당신이 대사관에 용의자를 숨긴 비호 세력’이라고 반박한 셈이다. 아부 바카르 청장은 “북한이 어떤 협조도 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현지 경찰 당국이 평양으로 달아난 공작조 4명의 인도를 북한에 요청한 것도 북한 압박용으로 보인다. 북한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미가입국인 데다 양국은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지 않아 현실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부 바카르 청장은 김정남의 장남인 김한솔이 20일 입국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며 김한솔에게 “신변 보호를 보장할 테니 말레이시아로 오라”고 요청했다. 이어 “유족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혈연관계나 친척 누구라도 유전자(DNA) 표본을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여성 용의자가 제주도를 방문했다는 본보 보도에 대해서는 “수사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현지 북한대사관은 이날 A4 용지 3장짜리 반박자료를 내 “독살 근거가 없다. 리정철을 석방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