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 국민에게 매월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UBI)’ 논쟁이 전 세계를 달구고 있다.
기본 소득은 다른 복지제도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2가지 특징을 지녔다.
첫째 부자건 가난하건, 일을 하건 안 하건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돈을 준다. 둘째 지급에 어떤 부가 조건도 붙지 않는다. 영어로 ‘유니버설(universal)’ 혹은 ‘언컨디셔널(unconditional)’ ‘베이직 인컴(basic income)’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지급 실시를 전하는 BBC 보도]
○ 자수성가 억만장자
시필레는 오울루대에서 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1986년 전자제품 회사 라우리 쿠오카넨에 입사해 제품개발 매니저로 일했다. 공학과 마케팅 양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불과 35세인 1996년 이미 핀란드 최고소득자였을 정도로 돈을 잘 벌었다.
[1997년 기업가 시절의 시필레(당시 36세)]
2년 후 또 다른 전자업체 솔리트라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시필레는 자신의 돈으로 솔리트라 지분을 인수했다. 이를 미국 ADC 텔레커뮤니케이션에 1200만 유로(약 140억 원)에 되팔아 돈방석에 앉는다. 이후 정보기술(IT) 벤처와 바이오에너지 기업을 전문으로 한 투자회사 포르텔 인베스트, 무선 정보기술회사 엘렉트로비트 등을 설립하며 핀란드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제 분야에서 이룰 것을 다 이룬 시필레는 정계로 눈을 돌렸다. 50세가 되던 2011년 중도우파 중앙당 소속으로 오울루 시 국회의원에 뽑혔다. “수차례 창업에 도전해 여러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업가 정신을 정치에 접목하겠다”는 그의 일성은 핀란드 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2년 중앙당 대표가 된 그는 2015년 4월 총선에서 중앙당을 제 1당으로 만든다. 정계 입문 4년 만에 최고 권좌인 총리가 됐다. 중앙당은 당시 총선에서 전체 200석 중 약 40%인 49석을 얻었다. 게다가 이전 총선보다 15석이나 늘었다. 다당제 국가인 핀란드에서 특정 정당이 전체 의석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것은 이례적이어서 핀란드 전체가 놀랐다.
특히 이 승리는 개인적 아픔을 딛고 일궈낸 것이어서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총선 기간 중 그는 막내아들 투오모(당시 22세)를 수술 합병증으로 잃었다. 며칠 간 유세를 중단하고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나섰다.
○ 경제난에 지친 민심, 기업가를 택하다
디지털 기기의 급속한 발달로 전 세계 종이 사용량이 줄어든 것도 또 다른 기간산업인 목재·제지업에 악영향을 줬다. 이 와중에 핀란드의 주요 교역국인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으로 서방의 경제제재를 맞으면서 대러시아 수출이 줄고 러시아 관광객도 급감했다.
3대 악재가 동시에 겹친 핀란드 경제는 2012년부터 3년간 마이너스(-) 성장했고, 2015년과 지난해에는 제로(0)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업률은 8~9%대로 높아졌고 청년 실업률은 20%를 넘나든다. 시필레는 “핀란드가 국가 부도를 맞은 그리스가 될 수 있다”며 일자리 20만 개 창출, 기본소득 지급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 시필레가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이유
언뜻 좌파 정책처럼 보이는 기본소득은 우파도 호감을 보이는 정책이다. 다만 주안점이 완전히 다르다. 우파가 ‘복지제도 축소와 고용 유연화’를 위해 기본소득을 언급한다면 좌파는 ‘양극화와 빈곤 해결’을 위해 이를 주창한다.
시필레 총리를 비롯한 우파는 “기존의 모든 복지제도를 폐지하고 현금 지급으로 단순화하면 수혜자 선별 등에 드는 행정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허드렛일을 하느니 놀면서 실업 수당을 받겠다’는 근로자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복지의 천국’ 북유럽에서는 수많은 사회보장제도가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보장 체계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시필레는 “2년 후 대조군이 아닌 실험군에서 의미 있는 취업 증가세가 나타날 것”이라며 자신만만하다. 내년 말 이번 실험이 끝나면 기본소득 지급 대상을 파트타임 근로자, 프리랜서 등 저소득 직장인에게 확대하겠고도 밝혔다.
○ 복지의 신 기원? 희대의 장난?
시필레의 행보에 대한 우려도 크다. 우선 재원 마련이 문제다. 2000명에게 2년간 ‘용돈’ 정도의 소액을 지급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수백 만, 수천 만 명 국민에게 생활이 가능할 돈을 매월 지급하려면 수백 조, 수천 조원의 돈이 필요하다. 어지간한 증세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기본소득 논의 자체가 최근 전 세계를 휩쓰는 포퓰리즘의 연장선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일을 해야 돈을 번다’는 인류의 오랜 전통을 무시한 이상론자들의 탁상공론이라는 지적이었다.
시필레가 시도한 초유의 기본소득 실험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희대의 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고 복지모델의 신기원을 수립할 수도 있다. 분명한 점은 ‘정치인 시필레’의 운명이 그 결과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