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장미와 가시’라니, 시의 제목만을 본다면 장미를 찬미하는 시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가시 때문에 장미는 더 매력적이라는 둥, 다들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오산이다. 이것은 상투적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시는 장미가 아니라 삶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물어본다.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다. 생의 여정에서 그는 지금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러니 처절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뭐지? 삶이란 뭐지? 뭐길래 이렇게 아픈 거지?
이 시를 읽고 나서 우리도 한동안 먹먹해서 앉아 있게 된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손을 뻗어 가엾은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 줄지도 모른다. 시인의 상처가 마치 우리 상처 같고, 시인의 장미가 마치 우리 미래 같아서 시를 붙들고 같이 울고 싶어진다. 견뎌온 세월이 장미를 보장해 준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정작 내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열심히 토닥토닥이라도 해주자. 묵묵하게 아파온 삶과 몸과 마음을 위하여. 이 시는 힘든 세상을 건너는 우리 모두의 시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